은사(방언) 세미나 (2015.6.21)

on 16/08/2018 by KYU CHEOL HWANG

은사(방언)세미나 2015.6.21 ▣ 들어가면서 한국의 방언 열풍 1. 『하늘의 언어』-김우현, 2007년 7월 방언은 구원과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는 성령님과 더불어 기도하는 하늘보좌로부터 흘러나온 '하늘의 언어' 이다. 방언은 '영의 언어'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알 수 없는 언어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언어로 계속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그것을 권하기 때문이다. 방언은 특별히 '순종'을 배울 수 있는 축복의 은사다. 적어도 하루 30분 이상, 성령님을 의지하여 한 달 정도 깊은 방언에 순종하면 바람이 임의로 불 듯이 변화된 우리의 모습과 만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방언을 하기 위해선 정말이지 순전하고 집요한 순종과 매달림이 필요하다. 방언을 사모했던 많은 이들이 엄청나게 애를 썼지만 받지 못한 기억이 난다. 방언은 우리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에 어떤 형태든지 이미 우리는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기도와 찬양 가운데 우리 영은 그것을 너무나 표현하고 싶어했지만 지식의 부재로 하지 못한 것이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입을 영어서 시도를 하지 않았을 뿐이다. 기독교 출판사인 규장과 자매회사인 갓피풀닷컴의 직원 70여명이 근무 중 한꺼번에 방언을 받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이 상상치도 못한 놀라운 일은 2007년 4월6일 오후4시에 일어났다. 이들은 3시간이나 업무를 중단하고 방언기도에 전념했다. 갓피풀 닷컴의 조한상 사장은 내가 하는 방언을 그냥 따라하는 순간, 방언을 받았다. 은지라는 자매도 손기철 장로의 사역팀을 통해 '할렐루야'라는 말로 방언을 했다. 집회를 인도하면서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할 때 '방언을 말하다'의 헬라어인 '랄레오 글로사' 중 '랄레오'라는 단어만으로 기도한 적도 있다. 예수원 출신의 한 형제는 '아버지'란 말을 간절히 반복적으로 구했는데, 방언이 터졌다고 한다. 방언은 성령께서 영으로 비밀을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므로 사탄도 알아들을 수 없다. 방언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것은 아버지 사랑이며 그 영광의 보좌이다. 방언은 그 사랑의 비밀을 하나님께 고하고 나누는 밀어이다. 사탄의 방해 없이 아버지의 심장으로 곧바로 가는 길이다. 방언은 성령님의 역사에서 가장 기초이며 놀라운 능력이다. 방언은 단지 하나의 은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주님이 여시려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 방언은 무엇보다 방언을 하는 개인의 덕을 세우고 영적으로 충전시켜주며, 나아가 교회를 섬기고 새롭게 하는 데 유익하다. 방언은 또 사회와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주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살도록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의 보좌 가운데 나아가기 위해, 우리 영혼이 더욱 충만해지고 세워지려는 데 방언의 목적이 있다. 따라서 아직 방언을 받지 못한 이는 받기를 소원하고, 이미 받은 사람은 날마다 방언으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비밀을 발견하고 체험해야 한다. 방언의 회복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부흥을 위한 '하늘의 전략' 이다. 2.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옥성호 2008년 2월 <하늘의 언어>를 읽은 후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주변에서 수도 없이 방언하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사태가 그토록 심각하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생생하게 알았다. 연이어 손기철 장로의 <성령님 고맙습니다>와 손 장로가 멘토로 삼는다는 마헤쉬 챠브다의 <방언체험>을 비롯해 여러 권의 번역된 방언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굳이 <하늘의 언어>에 실린 내용이 독특한 것이 아니라 방언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얘기 수준’이라는 점을 깨닫고 더 충격을 받았다. 수많은 방언 책들을 보면,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중심으로 한 서너 개의 구절을 장식용으로 붙이고 나머지는 세상에서 듣고 보도 못한 얘기들로 채워놓았다. 방언이 등장한 최초의 성경은 사도행전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이다. 게다가 최초로 등장한 방언은 권장할 대상으로서의 은사가 아니라 조심하고 선별해야 할 대상의 은사로 소개됐다.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은 방언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유일한 성경구절일 뿐만 아니라 방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는 오늘날 중지되었다. 방언과 예언, 지식이란 세 가지 은사를 완성된 성경이 없었던 초대교회 시절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을 통해 완성되자 사라졌다. 따라서 목적을 완수한 방언은 그쳤다.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방언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유행하고 있는 방언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통해, 우리는 바른 방언이 반드시 통역될 수 있으며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계시의 은사로 사용됨을 분명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주변의 방언은 언어가 아니기에 통역될 수 없으며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철저히 개인의 경건생활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방언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연구를 수행한 킬달 박사는 통역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한 방언을 녹음한 후, 통역 은사를 받았다는 7명에게 각기 틀어주고 통역을 요청했다. 그 결과 일곱 가지의 통역 중 비슷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킬달 박사는 '오늘날의 방언은 학습된 현상이다. 방언을 하는데 필요한 심리적 조건이 갖추어진 사람은 누구나 쉽게 배워서 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 방언이 아니다. 오늘날의 방언은 학습과 훈련으로 습득 가능하다. 은사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에 따라 주시는 선물이다. 은사는 우리가 달라고 조른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물인 은사를 달라고 집단으로 모여 떼쓰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달라고 떼쓰고 조르는 과정을 통해 얼마든지 방언이 학습되고 훈련될 수 있다는 점이다. '주여, 주여' 또는 '할렐루야, 할렐루야' 등의 간단한 발음을 반복해 말하면 누구라도 혀가 꼬이게 되고, 곧이어 발음은 '랄랄랄, 랄랄랄'로 바뀌면서 유창한 방언을 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쪽집게' 방언 전문가들이 등장해 전국을 돌면서 사람들이 방언을 하도록 유도하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방언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인양 말하면서 보급하는 그 어떤 움직임도 중지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방언은 기독교 밖에 더 많이 있다. 오늘날의 방언은 하나님께서 성령강림의 놀라운 역사적 표적으로 사용하셨던 오순절 방언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흔하디 흔한 이 방언은 어디에나 언제나 있었던 소리이다. 약 2500년 전의 그리스 플라톤의 기록에서부터 발견되는 방언은 그리스 시절 각종 신전에서 사제들이 돈을 받고 알려주는 신비한 예언의 통로로 사용됐다. 또 오늘날에는 북극의 에스키모들의 종교의식에서부터 히말라야 티벳의 사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김동수 2008년 5월 옥성호씨가 저술한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의 주장은 이와 같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쓰기 전에 고린도전서를 읽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은 사도들에게 만이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다. △바울이 주장한 방언은 외국어였다. △방언 통역이 있다는 것은 방언은 실제 언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폐품을 쓰지 않는다. 방언은 이방 신전에서 쓰던 폐품이었다.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누가가 고린도전서를 읽고 사도행전을 썼다는 말은 전혀 증명되지 않은 상상이다. 사도행전 내러티브를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이 계속 그곳에 있다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이들 중 어떤 사람도 그곳을 떠났다는 기록이 없다. 방언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표적이라는 논증은 성경 구절을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결론을 이끌어 낸 논리 전개이다. 방언이 실제 외국어였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는 말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오히려 실제 외국어였다면 어떤 경우에는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게 된다. 방언이 이방 신전에서 쓰던 폐품이었다는 말은 성경과 그 배경의 기본을 전혀 모르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구약의 제사·계명들이 고대 근동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과 유사한 것이 많은데, 구약에서 하나님은 상당한 정도로 폐품을 쓰신 것이 된다. 최근 방언이 신약 성서 이전에도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유대교와 헬라 문헌을 광범위하게 연구한 호벤덴(G. Hovenden)에 의하면 신약의 방언과 같은 것은 이전의 그 어느 문서에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이전에 신탁이라는 형태의 광범위한 영적 현상이 있었으나 기도로서의 방언은 바울이 처음으로 말한 것이다. 또 이 책의 저자는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이 방언을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장의 형식으로만 판별해서 그것이 유일한 방언에 대한 정의 구절이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거의 수긍이 가지 않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바울의 방언에 대한 정의는 14장 2절에 나타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구절에 따르면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기도하는 신비의 언어인 것이다. 신약성서 이전에 유대교나 헬라 문화에서 성경과 같은 종류의 방언이 존재했다는 주장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당시 이방 신전에서 행해졌던 것은 신탁이지 방언이 아니었다. 신탁은 설명되는 언어이지, 방언처럼 말하는 사람이 모르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방언은 그 방향이 하나님께, 신탁은 사람에게 향해 있다. 기독교 이전에 신탁이라는 형태의 광범위한 영적 현상이 있었으나 기도로서의 방언은 바울이 처음으로 말한 것이다. 또한 '방언을 사모하라'는 가르침이 '은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준다'는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는 가르침에 대해선, 그것은 오히려 은사를 사모하는 것을 꾸짖는 바울의 레토릭(수사학적 표현)이라고 한다. 특히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할 때, 그것을 예언으로만 제한한다. 이것은 논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했을 때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듯이, 성령의 은사가 하나님의 주권으로 신자의 사모함으로 받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본래 방언은 사도시대에만 한정적으로 주어졌던 것이며, 방언은 모두 실제 외국어였고, 방언은 바울이 혐오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현대 방언은 성서의 방언이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은 그 성서적,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방언세미나에 관한 참고 서적 4. [신약이 말하는 방언] 김동수(평택대학교 교수)2009년 12월 3.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 김동수(2008년 5월) [방언,성령의 은사] 김동수(2015년 5월) [위로와 회복의 방언] 김동찬(미국 오럴 로버츠 대학, 석,박사) 2007년 12월 1. [하늘의 언어] 김우현(2007년 7월) 7. [방언 그 불편한 진실] 이창모(총신대학원, 김천 경배와 찬양교회 담임) 2014년 9월 8. [방언을 검증하자] 노우호(마산 샬롬교회 담임, 에스라하우스원장) 2014년 12월 6. [신사도운동에 빠진 교회] 정이철(2012년 12월) 2. [방언,과연 하늘의 언어인가] 옥성호(2008년2월) 5.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박영돈(고신대학원교수) 2011년 2월 [성령은사론] 리차드 개핀(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약교수) 1981년 [무질서한 은사주의] 존 맥아더(미국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담임목사) 2008년 3월 [성령세례와 충만, Baptism and Fullness] John R. W. Stott 1964년(2002년)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N. H. Gootjes 1989년 7월 [성령세례, Joy unspeakable] D. M. Lloyd-Jones 1964,5(1986년) [성령의 주권적 사역, Prove All Things] D. M. Lloyd-Jones 1980(1990년) [성령론] 차영배 (총신대학원 교의학 교수) 1987년 6월 [성령이 답이다] 서천석(서울 새생명교회 담임) 2015년 5월 세미나 진행 순서 1. 은사중단론과 지속론 2. 현재 일어나는 방언, 3. 교회사의 증거 4. 성경의 증거 방언에 관한 네 가지 견해 1) 적극적 부정 현대에 교회에서 일어나는 방언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며 때로 악마적이기까지 하다. 방언과 같은 기적적 은사는 사도의 표지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주어진 오늘 날에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은사다. 방언은 있었으나 이제는 그쳤다. 방언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억울한 감정이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이상한 형태의 하소연으로 나타난 것이다. 2) 소극적 인정 방언은 바울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있다. 하지만 방언이 신앙생활에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방언은 성령의 열매(사랑)보다 덜 중요하므로 별 필요 없다. 방언은 예언의 은사보다 열등한 은사이므로 별 필요 없다. 방언은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 중요하지 않다. 3) 지나친 긍정 방언의 은사는 신앙 수준의 척도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신자는 성숙한 신자이고, 방언을 체험하지 못한 신자는 영적으로 초보 신자다. 방언의 은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없다. 4) 적극적 인정 방언은 신앙 수준의 척도는 아니나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은사이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신자는 신앙의 침체에서 쉽게 회복되고 신앙 성장이 빠르다. 방언은 바울이 권장한 것이고, 누가는 성령 세례(성령 충만)의 표지의 하나로 제시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이 성경적 견해인가? 각자가 자란 신앙 전통과 자신의 개인 체험에 따라 방언에 대한 입장이 다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전통과 개인 체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로, 성경이 말하는 방언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되도록 자신이 지금까지 견지해온 견해를 의심하면서 선입견을 배제한 상태에서 성경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 은사 중단론과 은사 지속론 중요쟁점 고전13:8~10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온전한 것을 성경의 완성으로 본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완성됨으로 모든 은사가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설로 받아 드리지 않는다 고전 13:11,12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1938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시작되어 은퇴하기까지 30년 가까이 목회를 하셨는데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자신이 세 그룹의 사람들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는 그런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로이드 존스가 처음에 강조했던 것을 잘못 이해해서 참된 기독교 체험과는 격리된 성경적 정통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었고, 두 번째 부류는 기쁨을 결여하면서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몰려든 칼빈주의적 경건주의자들이었고, 세 번째 부류는 그의 초기에 가르쳤던 그 강조점은 회피하고 이제는 더욱 지나쳐 은사 운동에만 관심을 가지는 감정주의 복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적 건강을 성경적 이해의 빛에 비추어 로이드 존스는 첫 번째 그룹을 죽은 정통으로 보았고, 두 번째 그룹을 영적인 벌레들에게 먹혀가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로 보았고, 세 번째 그룹을 암적인 광신주의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는데, 먼저 성경적 정통주의자들의 특징은 무슨 말만 하면 항상 성경을 들이대며 성경만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18세기의 이신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숭배했다면 오늘날 성경적 이신론자들은 성경을 숭배하며 이들은 그리스도와 성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을 신격화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류인 칼빈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 이들도 무슨 이야기만 하면 칼빈을 내세워 말을 하는데 마치 칼빈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기준을 칼빈이 한 말에 맞춥니다. 이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칼빈은 그 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당나귀(도구)일 뿐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류는 감정적인 사람들로 절제가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흠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절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절제가 결여된 상태에서 혼자 하나님을 독점한 것처럼 과대망상 속에 사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 부류가 오늘날 현대교회 안에서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 성령의 은사에 냉담한 사람들은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로 교회 안에서 폐지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근거지는 초교파 신학교인 달라스 신학교라 할 수 있고 이 신학교 총장이며 조직신학 교수였던 존 월부어드는 사도시대 이후로 교회 안에서 기적이 사라졌다고 말하는데 그의 동료이며 엉거성경사전을 펴낸 메릴 엉거도 “기적적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 사라졌다는 사실을 교회 역사에 의해 잘 입증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고 기독교 신앙이 복음의 확증을 위해 외부의 표적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메릴 엉거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인 벤자민 브레킨리지 위필드가 1918년에 저술한『Miracles Yesterday and Today』를 참조했는데 이 책은 오늘날 미국 안에서 카리스마적 은사의 타당성을 반대하는 가장 유력한 책으로 위필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이 은사들은 분명히 사도들에 대한 확증이었다. 이 은사의 기능은 사도시대 교회에 국한된 것으로 사도들이 죽을 때 그 은사들도 필연적으로 그들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도 현대의 위필드 계승자들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동일한 방법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먼저 커버넌트 신학교와 낙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로버트 레이몬드는『What about Continuing Revelations and Miracles in Presbyterian Church Today』에서 성령의 은사 계속설은 계시 은사들의 중지라는 장로교 교리와 배치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후에 고린도전서 14장을 개괄적으로 주석하면서 “계시가 사도시대 말기에 중지되었다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I / i, vi), 이런 의미의 선지자들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예언은사를 추구하려는 바울의 권면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예언과 방언, 지식 등 계시은사들은 계시과정의 종결과 함께 종결되었다고 주장한 다음 기적의 관계를 거론하면서 능력의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그랬듯이(요 5:36, 10:38, 행 2:22), “사도적 메시지의 확증” 즉 사도들의 권위를 확증해 주었던 “특수 표징”들은 사도들이 지나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중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리처드 개핀은『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에베소서 2장20절 말씀을 근거하여 “교회는 사도들과 신약적 선지자들의 토대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 예언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일시적이고 비계속적인 기능으로 사도직과 함께 교회생활에서 사라진 것이다” 라고 말하며, 베드로전서 4장10-11절 말씀을 근거하여 성령의 은사들은 말씀은사와 행위은사로 나누고 예언과 방언과 같은 계시은사는 교회창설적 성격을 띤 것으로 교회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개핀은 이런 원리하에서 신유와 기타 관련된 은사들에 관해서 특히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런 은사들은 “사도적 표징들”이므로 사도 이후 교회의 생활에서는 사라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런던개혁침례신학교의 교장인 피터 마스터스도『The Healing Epidemic』에서 “카리스마적인 혼란의 시대인 요즘에 표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에게만 특별했고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예언, 방언, 신유, 기적 등의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런 은사들은 교회 창설기의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지금은 성경계시의 종료 면에서 중지된 은사들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증거로 엡 2:20, 3:5, 고전 13:8-12, 14:20-25, 29-30절 등을 제시합니다. 반면에 옥스퍼드대학 위클리프홀 신학대학장인 마이클 그린은 “은사중지설은 우리 자신들을 성령의 강력한 삶에 노출시키기를 꺼리는 단순한 도피주의이며 성령은 바람과 불의 영으로 남아 계시고 교회 안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분을 어떠한 교회적 박스 안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되며 신유, 예언, 축사 및 방언이 마지막 사도들과 함께 죽어버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웨인 그루뎀은 고린도전서 13장8-12절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영적인 은사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신자들 가운데 지속될 것”을 말했고,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 신약학 교수인 고든 피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시점에는 현시대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은사들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들 중에 존 스토트는『One People』에서 은사목록 중에 사도직과 예언과 기적은 제외시켰고, 존 맥아더는『The Church, the Body of Christ』에서 기적과 방언과 신유와 방언통역 같은 은사를 일시적 은사로, 데이비드 호킹은『Spirit Gift』에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모든 은사의 기능이 끝났다고 말하며, 메릴 엉거는『The Baptism and Gifts of the Holy Sprit』에서 “표적은사” 신유, 이적을 행하는 것, 방언, 방언통역, 예언과 사도 같은 은사는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존 월부어드는『The Holy Sprit』에서 모든 은사의 기능은 끝났다고 말합니다. 이와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도 여전히 동등하게 그 기능을 발휘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은 찰스 험멜, 리크 연, 케네드 킹혼, 레슬리 프랜, 도널드 지 등이며, 특히 마이클 그리피스는『Cinderella Betrothal Gifts』에서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입장은 자유주의에 가까운 바람직하지 못한 입장”이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이들과 달리 자신의 입장을 중간에 바꾼 사람들도 있는데 보수주의 침례신학교 교장인 장 얼 레드마커는 오순절 계통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오순절 교회를 떠나자 교회 안에서의 방언사용을 누구도 막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반대하며 비판했는데 마치 제자훈련 세미나로 한국과 미국에서 잘 알려진 빌 헐처럼 성령의 은사를 처음에는 인정하다가 탈봇 신학교에 들어가서부터 철저하게 성령의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굳게 믿은 것처럼 말입니다. 빌 헐은『성령에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2년 뒤 그토록 성령의 은사를 주장하던 나는 성령의 은사가 중단 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내 주위에 있는 매우 경건하면서도 훌륭한 강해 설교자의 영향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나중에 돌아와 오늘날도 기적의 은사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장로교 학자 로드먼 월리엄즈도 전에는 기적적인 은사가 사라졌다는 위필드의 견해를 따랐으나 이제는 성령의 은사를 확신하며 “오랜 세월 동안 신약성경을 잘못 읽어 온데서 돌이켜야 한다”라고『The Era of the Spirit』에서 강력히 주장합니다. ◈ 종교개혁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은 성령의 은사에 관해 별로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루터는 기적적 은사의 활용을 사도시대에 국한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런 은사가 당시의 교회에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칼빈 역시 성령의 은사가 계속 나타날 수 있다는 사상에 개방적으로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은사는 사도시대에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와 20세기 사이에 성령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다룬 저술로 17세기 영국의 존 오웬의『The Holy Sprit His Gift and Power』저서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저서는 후기 개혁자나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오웬은 은사가 교회 안에서 유효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처음으로 일반은사와 특별은사를 구별한 사람으로 이런 구별은 후기 개혁신학에서 보편적으로 되었습니다. 여기서 '특별은사'란 사도시대에 국한된 것으로 방언, 기적, 신유, 사도, 예언, 전도자의 여섯 은사를 말하는데 이와 비슷한 사상을 19세기에는 아브라함 카이퍼에게 20세기에는 벤자민 위필드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존 스토트는『성령세례와 충만』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나는 오늘날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에 의해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할 특별계시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며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기적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반면에 로이드 존스는『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 이후에 교회사의 기록도 결단코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단지 성령을 소멸할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견해 중에 어느 견해가 옳다고 보십니까? 만약 스토트의 견해를 옳다고 보는 사람은 로이드 존스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고, 존스의 견해를 옳다고 보는 사람은 존 스토트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셨던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더 예로 캘리포니아 샌 페르난도 지역에 두 개의 교회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인 “그레이스커뮤니티 교회”는 존 맥아더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로 “카리스마 운동 가운데 잘못된 것”이라는 주제의 연속설교에서 은사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하고『무질서한 은사주의』란 책을 써서 오늘날 교회 내에 어지럽게 퍼지고 있는 잘못된 은사운동에 대해 비판하며 이런 부류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바로 옆 “처치 온 더 웨이”인 잭 헤이포드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방언으로 설교하고 통역을 하며 완전히 오순절 초대 교회처럼 예배를 드리고 많은 책들을 저술했지만 특히『영적 언어의 아름다움』이라는 책은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어 방언은사에 대해 아주 긍정적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두 교회 모두 그 지역에서 4천명 이상 출석하는 교회로 양쪽교회 신자들 역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있지만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는 서로 간의 견해를 달리할 뿐이지 그렇다고 두 교회 중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 로이드 존스의『성령세례』서문에 보면 “초대교회가 기독론 논쟁 시대라면 교부시대는 삼위일체 등의 신론 논쟁 시대라고 볼 수 있고 종교 개혁 시대에는 구원론 논쟁 시대이고 현대는 성령론 논쟁 시대라고 할 만큼 성령론에 관한 논의가 국내외를 물론하고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 논쟁은 개혁파 계통의 성령론과 오순절파 계통의 성령론으로서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혁파의 중요한 가르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받고 사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오순절파의 가르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계속성과 오순절은 하나의 교회부흥의 모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역사는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성령론에 대해 전쟁 아닌 전쟁이 그것도 믿는 자들 안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데 사실 성령은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 들여야 할 인격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시지 논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은사를 거론하면서 은사주의자들에 대해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성경대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존 입장을 고집하며 성령에 대해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소천한 존 스토트의 책을 읽어보면 “최근에 어떤 모임에서 나는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그 동안 내가 지나치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것과 그 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을 무척 꺼려왔던 점에서 내가 미성숙했음을 고백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 나는 대화의 진전을 위해 우리가 동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 영역을 제안했다. 첫째, 진리의 객관성, 둘째, 그리스도의 중심성, 마지막으로 삶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자연과 성경이 보여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풍성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을 지니신 분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과 모든 풀잎, 모든 눈송이를 제각각 다르게 만드셨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모든 정형화된 것들에 대해 더 거부감을 느끼게 됨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특정한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급급한 것 같다. 참으로 슬픈 현상이 아닌가? 나 자신은 영적경험은 매우 다양하며 영적은사에도 상당히 여러 종류가 있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서로 속박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기만 한다면 풍성한 다양성을 지니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교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은사운동을 두고 어떤 이들은 은사운동의 문제점을 강조하면서 은사운동으로부터 배울 점들이 없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많이 체험한 고린도교회를 두고 문제투성이 교회라고 운운하면서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거와 같습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성령의 은사로 시끄러웠던 고린도교회가 이단이었습니까? 아니면 예수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였습니까?(고전 6:20).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은사 문제로 시끄러워서 ‘너희가 아직도 육신의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말하면서 다시는 은사를 사용하지 말고 “말씀만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고전 14:39), 말합니다. 은사 문제로 조금 시끄럽기는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모하라는 것입니다(고전 12:7). ◈ 로이드 존스가 말한 대로 공동묘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살아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는 문제들도 많은 것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사데 교회는 어떠한 교회입니까? 인간 눈에는 살아있는 교회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죽은 시체들이 모여 있는 교회로 보인 것은(계 3:1),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고 성령을 거역하고 대적해서 소멸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살전 5:19-20). 사실 우리는 고린도교회로부터 배워야 하고 오늘날 은사운동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피터 루이스의 글을 인용해 “만일 개혁주의와 은사운동의 최선의 요소들의 결함이 잠재적 폭탄이라면 부흥은 그것에 불을 불이는 성냥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만약 카리스마주의에 속한 사람들과 중단론자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존중한다면 분명히 하나님 나라는 확장이 될 것이지만 웨인 그루뎀이 말한 것처럼 이 두 진영이 서로 상대방에게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 라고 계속 주장한다면 교회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대로 만약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면 결국 같이 망하게 될 것입니다(갈 5:15). ▣ 현재 일어나는 방언 간증1 데이브 로보슨(Dave Roberson) 목사는 지금까지 자신이 직접 19건의 제노글로시 현상을 경험하였는데 그중 제일 처음 일어난 사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처음 이것이 나타난 경우는 캘리포니아 산 호세에서 그리스도인 토크 쇼에 손님으로 초대 받았을 때입니다. “로보슨 형제, 지금까지 형제의 삶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매우 실제적이도록 해주었던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경험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친구여,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너무나 변화시켜서-----.” 갑자기 내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도 알기도 전에 나의 혀가 내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을 굴리듯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 수도 있었지만 기름부음이 너무나 강해서 이 초자연적인 언어를 밖으로 쏟아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 방송국의 반은 크리스천 기업이 아닌 회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합법적인 것인지 아닌지도 몰랐습니다. 나는 진행자를 슬쩍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나의 행동을 멈추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방언을 마치면 하나님께서 내게 통역을 하게 하실 테니까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마치고 나서도 나는 그냥 앉아서 카메라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무 통역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원한다고 내가 한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이제 나는 어떻게 하지요? 주님 여기서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 프로그램을 마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모두 다 그 사건을 무시하고 지나쳐버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방송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서는데 한 여자가 내게로 달려왔습니다. 독일의 시골 마을에서 이민을 온 그 여자는 독일어 엑센트가 섞인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버슨 형제, 로버슨 형제! 형제는 언제부터 이렇게 옛날 시골 지방 엑센트가 있는 독일어를 했습니까?”“부인, 무슨 말씀이죠?” “나는 최근의 영어도 겨우 할 뿐인데요.”“그럼 형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나요?”“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당신이 갑자기 영어를 멈추고 오래된 시골 독일어로 독일 사람들을 향하여 연설을 했습니다.’“내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새크라맨토에 사는 한 독일 여자가 방금 전화를 했는데, 내가 독일어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여서 그녀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독일 여자는 불치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당신이 그녀에게 어떻게 하라고 지시를 해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그 방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녀가 일어나보니 완전히 병이 나아 있었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간증하려고 전화를 한 것입니다.” 간증2 23년전 32살때 지금은 전도사가된 친구가 자꾸 교회를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자가 교회에 가서, "이것 주세요...저것 주세요.."하는 그런 것이 용납 자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금요 철야 기도에 가자고 몇번 연락이 왔지만 그때마다 뭔가 핑게거리가 생기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친구도 지쳤는지 연락이 오지 않게 되었고,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찾아 간것이 30분 지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하로 내려가서 아무도 모르게 맨뒤 기둥 뒤로 숨어서 앉았습니다. 그 누구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목사님도 머리를 숙이고 기도중에 계셨고, 기둥 뒤로 숨어서 들어가 바로 앉았기 때문에 상황 파악을 위해 목사님께서 눈을 뜨고 기도를 하고 계셨다고 하더라도 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자리에 앉았을 때 갑자기 목사님께서 제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주의 종, XXX가 왔습니다..."하시면서 기도를 시작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친구도 제가 온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목사님께서는 저를 본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고 간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거든요. 예배가 끝난후 목사님실로 오라고 하셔서 지금은 전도사가된 친구와 갔더니 목사님도 다른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목사님께서도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집에 가면 5분이라도 좋으니까 기도를 해 보라고 하셨어요. 저도 참으로 희한해서 집에 와서 작은 방에 들어가 문을 꼭꼭 잠그고, 불을 끄고, 무릅을 꿇고, 두손을 마주 잡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머리를 숙이자 마자 갑자기 엉청난 불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거대하고 웅장한 불길이 우측에서 부터 좌측으로 곡선 커브를 그으면서 불길이 흐르는데 그 끝은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촛불의 끄트머리처럼 세밀하게 바람에 날리는 것 까지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조금 멀리는 좀더 작은 불...더 멀리는 더 작은불...온 천지가 불천지였습니다. 아! 인간이 눈을 감고 이렇게 볼 수가 있는가! 이것을 프로그램으로 개발하면 떼돈을 벌겠다하는 생각...그리고 너무도 신기해서 이곳 저곳의 불들을 자꾸 보았어요. 물론 눈을 감은채로 보고 있는 것이예요. 저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을 하기 때문에 매우 논리적이고 숫자 하나 점 하나 잘 못 찍어도 프로그램이 돌지 않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은 제게는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통해 목사님께 알리고, 2번째 금요일 철야 기도에 또 갔습니다. 목사님께서 15년째 교회 나오시는 70세 할머니, 여고생 그리고 저를 세우시고는 다음주에 방언을 받을테니 성도님들도 기도 많이 해 주세요라고 당부하셨어요. 저는 방언이 뭔지 몰라서 친구에게 방언이 뭐냐고 물었더니, 이러저러하다고 설명을 하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학교에 간다"를 방언으로 해 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라라라라랄라..."이런 것을 반복해요. 그래서 그게 무슨 언어냐? 하고 알기를 포기했어요. 그리고 다음 주 금요일...3번째 교회에 간 날이었어요. 기도가 시작되고 목사님께서 머리에 손을 얹자마자, 방언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이 불쌍한 것들...."하면서 고아, 병자, 노인, 과부들이 그렇게 불쌍해서 이 불쌍한 것들 하면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슬퍼했어요. 그러다가 끝날때쯤 부터 "내가 너희들의 뜻을 이루어 주리라."하는 방언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방언을 처음 받은 이후, 10년 동안 정신병을 앓던 정신병 환자를 하나님께서 치유하실때는 "사탄아! 물러가라!" "물러가라!"하는 방언으로 사탄을 물리치시고 정신병 환자를 낫게 하셨어요. 이처럼 방언은 완벽한 언어입니다. 한국인이 한국어를 말할 때 호흡 억양등이 자연스럽게 말하듯이 방언도 호흡 억양 액센트 모두 모국어와 일치합니다. 2개 언어를 모국어로 하시는 분들은 이해가 되실텐데요...제가 일본어를 처음 배워 일본어를 할 때는 입으로 말을 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한번 번역을 한 후에 입으로 일본어를 소리내어 말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머릿속에서 한번 번역하던 과정이 생략되고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바로 일본어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방언이 그런 식으로 똑 같습니다. 두뇌는 입으로 나오는 방언의 내용을 명확히 알고, 입으로만 한국어가 아닌 전혀 들어 보지 못한 말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즉, 머릿속에서는 "나는 학교에 갑니다"라고 입으로 발성하도록 지시를 하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와타시와 가고니 이기마스."라고 말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단지 "와타시와 가고니 이기마스."가 아니고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그런 말소리인 것 입니다. 외국어와 방언은 무슨 차이가 있을지 제 체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봅니다. 외국어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 처럼 처음에는 매우 어눌하게 시작합니다. "나는 학교에 갑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나'는 '와타시'고, 주격조사 '와'를 붙여야지...하면서 머릿속에서 문법을 짜맞추면서 1차 번역을 하고 난후 입으로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방언은 방언을 받는 그 순간부터 아주 유창합니다. "나는 학교에 갑니다" 이말을 "라랄라라 랄라랄 랄라라"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와타시와 가고니 이기마스."하는 것 처럼...단어도 있고 주격조사도 있는 완벽한 언어입니다. 저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을 많이 하지만, 대학에서 국어학을 전공했고, 영문과 숫자를 포함한 한글 문장을 분석해서 청각장애인 수화 및 지화로 통역하는 '수화통역박사'를 개발하여 국무총리상도 받았습니다. 한국어의 형태소 분석 프로그램을 개발했었기 때문에 방언이 언어인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가 방언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즉, 기도의 내용을 머리로는 한국어로 생각하면서 입으로 나오는 말소리는 한국어가 아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 입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모국어로 가진 분이라고 가정하면 머리로는 한국어로 기도하고, 입으로는 일본어가 나오는 것과 같은 형태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기도는 제 의지에 따라서 제가 그동안 잘못한 죄를 철저히 눈물로 회개하는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30분 정도 회개 기도를 눈물로 할 때는 매우 약하고 흐느끼고 죄스러워서 어쩔줄을 모르는 그런 방언을 제 의지로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즉 성령님이 임재하셔서 그때부터는 방언의 칼라와 톤이 완전히 180도 바뀌게 됩니다. 흐느끼는 약한 방언이 아니고 선포하는 매우 강하고 우렁찬 방언이 나오는데 그건 제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부터는 저는 로봇트 모드로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저는 저지만 제가 아니고 제가 저의 손발과 입술을 컨트롤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컨트롤 하시는 겁니다. 저는 그냥 평온하게 맡기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맞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나오는 방언도 "내가 너를 세우리라!" 든가, "이곳에 들고 나는 자마다 복을 받고 온 세상 땅끝까지 나아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와 같이 제가 감히 말 할 수 없는 그런 방언이 나오게 되는데, 기도할 때 백 뮤직으로 나오는 스피커의 소리를 압도할 정도로 큰 소리로 손으로 좌중을 지배하는 모션과 함께 그런 방언이 나옵니다. 그런 방언으로 하나님께서 정신병자를 치유하셨던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병자가 있으면 치유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신학을 연구하시는 신학자, 교회 전도사님이나 목사님들께서는 스텝1의 방언도 방언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그말도 맞다는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스텝2의 방언을 보다 사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 체험으로는 하나님께서 사탄을 물리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명백한 의미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저 적당히 혀를 꼬부려서 입술로 얼버무리는 그런 입술소리가 아닌 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실때 저희는 서울에 있었고, 병자는 포천에 있었지만 치유하시는 하나님은 시간과 장소를 지배하시면서 치유하셨습니다. 간증3 저는 현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며 방언은 15세(중2)부터 시작하였고 (모든 개인적 기도는 방언으로) 노우호 목사님의 방언 정리를 공부하고 그날부터 일체 방언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금식은 26세부터 금식의 생활화(?)로 살아 왔으며 2006년경에 노우호 목사님의 138차 CD를 통하여 성경을 알아가며 현재까지는 금식을 중단(?)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객관적으로 보실 수 있게 하기 위해 혹시 오해가 생기더라도 개인의 신앙경력을 밝힙니다. 저희 집안은 한국 감리교 전래부터(조선말) 목회자이며 독립운동가 집안입니다. 그 후 현재까지 남자는 거의 목사인 집안입니다. 물론 저 역시 모태신앙으로 태어났고 교육은 한국 사람이면 부러워할 정도의 교육을 받았으며 여러 대학에서 예술철학과 역사를 20여 년간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저의 자랑(?)을 늘어놓은 것은 어느 정도 한국 사람으로서는 건강한 신앙교육과 민족교육, 가정교육, 그리고 논리적인 사고와 책을 읽고 이해 할 수 있는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는 객관성을 이해시켜 드리기 위함입니다. (즉 어느 정도 건강한 비판적 사고 능력을 훈련받았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노우호 목사님이 정리하신 방언에 대한 정리를 성경적 근거로 확실한 논리 로 분석, 비판하여 노 목사님의 방언에 대한 정리에 오류가 있음을 밝힌다면 저는 당장이라도 즉시 방언에 대한 그동안의 태도를 바꾸고 더욱 열심히 방언으로 기도할 것 입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40년간을 성령께서 주신 것으로 믿고 열심히 방언으로 기도하며 주일성수, 교회봉사, 모든 공적 예배와 기도회 참석, 최선을 다해 헌금, 교우들과 좋은 관계, 목회자 섬기기를 저의 모든 정성을 다 해 충성하며 신앙과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였고 확실한 삶의 목표와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부하비니다.(물론 건강한 가치관을 가진 모든 분들이 더 열심히 서셨겠지만.) 특히 90년대에 삶의 극심한 위기가 찾아 왔을 때 약 10여 년간 방언 기도를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기도를 했지만 저의 모든 삶의 정황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회복 불가능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방언으로 장시간 기도하고 나면 그때 찾아오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 하나님이 나의 현실에 개입하시어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여 줄 것 같은 담대한 믿음 금식하며 밤새 철야하고 나서의 그 확신과 기쁨은 방언 하시는 분들은 모두 경험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은행과 채권자의 빚 독촉 전화 한통이면 그 평안과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하는 생활의 연속으로 매일 밤새 기도만(방언) 하였습니다. 물론 옵션으로 금식 곁들여서? 이 또한 방언 하시는 분들 중 비슷한 경험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은혜스럽다는 영성 서적(온갖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집, 기도 안내책자, 미국의 인기 있는 영성학자들의 책 – 리차드 포스터, 헨리 나우웬, 릭 워렌, C.S 루이스 ----- 닥치는 대로 삶을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읽을 때는 믿음이 생기는데 빚쟁이의 독촉에는 그 은혜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허무였습니다. 성경도 알든 모르든 열심히 읽어 약30독 정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목사님들의 상담과 베델성서, 크로스웨이 등 여러 코스의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성경에 모르는 부분이 왜 이렇게 많은지? 그래도 성경 속에 내 삶의 해결 방법이 있다기에 미신의 주술을 외듯 열심히 성경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래도 결론은 성경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헷갈리는 몸부림 속에 노우호 목사님의 138(능력)불법 복제 CD를 지인으로부터 전달받아 듣고 나의 존재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의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성경을 다독하였고 역사교육이 훈련되었기에 약 40시간 분량의 강좌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삶의 초점이 빚 갚는데 관심이 가지 않고 채권자의 그 모진 빚 독촉을 받는 가운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의 말과 태도일까? 하는 데에 저의 관심이 집중되게 되었고 빚진 자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답게 사는 것일까?”로 저의 관심이 바뀌어 그것에 집중되니까 빚 독촉도 두려워지지 않고 저의 소망과 믿음은 속으로 부터 샘솟고 그 후로는 저의 삶과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현세와 내세는 성경 속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남으로 해결된다는 이것이 너무 기쁘고 귀해 전하지 않고는 제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것 같은 거룩한 부담으로 성경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정의 가족 관계는 아름답게 회복되었고 경제문제도 하나님의 복으로 거의 회복되었습니다.저는 사랑하고 아시는 분들께서 그렇게 오랜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였기에 회복의 은혜를 주셨다고 칭찬해 주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격려의 말씀을 결단코 배격합니다. 저는 악령이 개발해 뿌려놓은 방언이라는 헛것에 속아 취해 있었다고 그리고 성경을 알아가며 저의 지나온 하나하나가 정리되고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 기도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성경을 배워야 알 수 있다는 것 2.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바른 기도를 할 수 없다는 것 3. 저의 방언 기도를 통한 기쁨과 확신은 거짓 기쁨과 거짓 확신이라는 것 4. 방언으로 기도하면 장시간 기도할 수 있다는 거짓 열심(교만과 탐심)으로 악령의 속임수 에 속았다는 것 5. 성경을 배우면 삽시간에 해결될 일을 악한 영이 방언 기도로 나를 유혹하고 속였다는 것6. 그 오랜 동안 악한영의 속임수로 헛된 기도를 했다는 것 7. 방언으로 기도를 오래 하여야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바로 이해하고 그 이해된 것에 순종함을 노력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있다는 것 8. 이렇게 악령의 자녀로 타락한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성경의 진리를 만나게 해주셨다 는 것, 이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것 성령을 받게 되면 신비한 신유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즉 사랑하지(섬기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받은 사람이 아니다.) 가장 깊은 영성은 성경을 잘 이해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바로 이해하고 순종하는 것, 즉 깊은 영성은 방언기도를 통한 평안과 기쁨,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가장 냉철한 이성으로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성 있게 성경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현재 현대 교회가 중요시 여기는 방언을 배격하고 금식은 배고파서(?) 전혀 못해도 열심히 성경을 전하니(에스라 성경강좌에서 배운것) 중요하지 않지만 귀신도 쫓아내고 우울증, 공황장애,… 등 온갖 치유현상은 항상 있고 경제문제, 인생문제, 영의문제, 육의문제, 자녀문제(쓰고 보니 꼭 기도원 부흥회 포스터 문구 같네요.) 해결되는 일이 주변에 항상 있습니다. 즉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빛(하나님의 진리)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악령은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성령은 방언이 아니라 성경을 바로 알아 말씀 충만할 때 성령충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령 충만일 수 있습니다. 방언은 성령 받은 증거가 아니라 악령에게 기도를 속아 방해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악한 사탄의 강력한 속임수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이니이다.” (요 9:25) 간증4 문봉주 씨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서 동북아 1과장, 중국공사, 아태 국장, 뉴질랜드 대사, 주미공사, 본부 대사직을 맡으셨던 분으로 지식인이며 공인(公人)이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이 직접 체험한 방언경험을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은 비록 이해되지 않는 방언이라도 그 안에 분명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봉주 집사님은 자신의 저서 "아침 형 인간을 넘어서는 새벽 형 크리스천"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사실 나는 방언기도나 예언의 은사를 굉장히 싫어하던 사람 중에 하나이었다. 지식인이 점잖지 못하게 따따부따 한다는 것 자체가 맘에 안 들었고,(중략)하지만 기도에 대한 마음이 코가 석자나 빠질 만큼 갈급하니까 얼른 모셔오라고 말했다. 며칠 뒤 예언 은사를 받은 박경림 집사님이 대사관저에 오셨다. 그 분은 자리에 앉으시자마자 대뜸 내게 물으셨다. "방언 기도하세요?"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서, 기도를 해도 마음에 열매 맺는 게 없어 이렇게 애를 태우고 있는데 방언 기도를 하느냐니 이미 사정을 듣고 왔을 텐데도 모른 척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나는 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니요." (중략) 그 분과 나는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혀가 나도 모르게 움찔댔다. 어떤 힘에 이끌려 혓바닥이 춤을 추었다. 아바 아바 랄렐룰... 나는 모르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방언이 터져 나온 것이다. 오, 주님! 제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기도입니까? 위암을 고쳐 주셨을 때도 깨닫지 못했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기도입니까?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하나님께 물어보았는지 모른다. 내 얼굴은 삽시간에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함께 기도하는 중간 중간 그 분이 내 방언기도를 통역해 주셨을 때는 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방언 기도는 내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날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냥 내 인생의 대표적인 명장면 몇 개가 후딱 지나가는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세밀하게 내 모든 존재의 기록이 몽땅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마치 누군가 내 삶을 통째로 고스란히 저장해 놓았다가 다시 되감아 보여주고 있는 듯 한 느낌이랄까?(중략) 눈물의 기도 세 시간을 마쳤을 때, 나는 그 집사님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제 일대기를 다 아십니까?" "참 놀랍죠? 점쟁이도 아닌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한 분이시니까 그렇죠. 집사님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제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집사님에 대해서 다 얘기해 주시니까 알 수 있죠."문봉주, 아침 형 인간을 넘어서는 새벽 형 크리스천, (두란노, 2004), 128-132 쪽. 인용 이러한 방언체험은 그 후 문봉주 씨의 신앙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뉴질랜드 대사로 재직 중에 신앙의 슬럼프에 빠졌었지만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후 영적인 침체를 극복하고 개인적인 부흥을 맛보았습니다. 이때 그가 경험한 "이해되지 않는 방언"은 단순한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경험한 방언은 자신이 말하고도 스스로는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이해 불가한 형태의영적 발성이었지만 그 안에는 놀랍게도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통역의 은사를 가진 성도를 통하여 분명히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이때 방언 통역을 하신 박경림 집사님과 방언을 한 문봉주 집사님은 처음 만나서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초면의 사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의 방언통역을 통해 드러난 문봉주 집사님의 세세한 과거사의 일들은 박경림 집사님은 전혀 알 수가 없는 일이었고 이로써 방언과 그 통역이 분명한 영적현상인 것을 더 확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세세한 과거사를 초면의 타인이 방언의 통역을 통해 소상히 드러내게 되었는데 이보다 더 분명한 방언과 방언통역의 자기증명은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노우호 목사님은 방언이 이미 끝났으며 통역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방검 (45)을 인용해보면"(이해할 수 없는) 고린도의 방언은 거짓 사도들과 궤휼의 역군들이 유포한 거짓 방언이었다. 따라서 정직하게 말하자면 성령이 성도들에게 방언(方言)을 은사(恩賜)로 주신 일은 성경적으로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 사용되는 외국어 형태의 표적으로 주어졌던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나타났던 방언도 서기 55년 이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방검 103) 그러므로 노우호 목사님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외국어든지 고린도 형태의 방언이든지 영적 방언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은 지금 바로 우리 곁에서 이처럼 부정할 수 없는 모습으로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형태(Unintelligible)의 방언과 통역,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그 정확성. 만일 그 방언 통역자가 제멋대로 지어낸 방언 통역이었다면, 예를 들어, 그저 '앞으로 좋은 일 있을 거'라는 식의 두루뭉술한 방언통역이었다면 사실 검증도 할 수 없으니까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방언통역을 통하여 방언이 문봉주 집사님의 과거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영적인 것이라는 점이 확실하게 증명이 되었습니다. 혹은 노우호 목사님께서는 귀신도 그렇게 할 수 있으니 이때 일어난 방언이나 방언의 통역이 사탄의 역사라고 주장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방검 27)하지만 문봉주 집사님은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후 영적인 침체를 극복하고 개인적인 부흥을 맛보았습니다. 이 후 이 분의 신앙의 궤적(軌跡)을 살펴보면 신앙이 뜨겁게 타올라 성경공부모임을 만들어 활발히 활동하며 복음을 전하셨고 나아가 공직은퇴 후 목회자가 되시고 지금은 일본 온누리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일 귀신이 그랬다면 왜 방언을 통하여 한 사람을 회개케 하고 그의 가슴을 뜨겁게 하여 더 열심히 믿게 하며 심지어 복음전파를 위한 목회자로 헌신하게까지 만들었을까요? 물론 귀신이 잠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요일 4:1, 개정)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악령의 속임은 잠시 동안 그의 사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잠시적인 기만술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지 그 최종목적이 사람의 회심이나 영적성장, 영혼의 구원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이롭게 하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귀신의 본성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어도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는 일을 하실 수 없듯이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이나 악한 일을 하실 수 없으십니다.) 마찬가지로 귀신도 자신의 악한 본성에 위배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열매로 그 나무를 판단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도 귀신도 거짓 방언도 각각 그 열매가 악하고 추할 뿐입니다.(마 7:16, 바른) 너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 교회사의 증거 교회사에 나타난 방언의 증거들 노우호 목사님께서는 방검(104-105)에서 "예수님께서 재림도 하시지 않았는데 이 세 가지 은사들은 (예언, 방언, 지식) AD 100년 이전에 이미 끝났다는 것이 교회사적인 기록이다. 실제로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그치게 된 것이 아니라 사도 시대가 끝나면서 확실히 사라졌다는 것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방검(105)에 교회사속에 방언이 끝났음을 입증하는 증언으로써 1. 4세기의 콘스탄티노플 감독 크리소스톰 2. 5세기의 어거스틴 3. 16세기 종교개혁이후의 신학자 4. 칼빈 5. 19세기 찰스 스펄전 목사의 주장들을 싣고 있습니다. 과연 노우호 목사님의 말씀대로 서기 100년 이후에는 방언이 교회사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는지 아니면 계속 존재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노우호 목사님의 주장이 맞는지 혹은 틀리는 지를 가늠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사실 방언에 대한 이슈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 유효기간(Validity)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방언이 특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과거 한정된 시기에만 잠시 주어졌으며 그 후에는 그쳤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오늘날에는 더 이상 방언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계속적으로 방언을 사용하려 드는 것은 성령과 상관없는 인위적 행위이며 더 나아가 악령들의 속임수에 빠지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Ben Bryd, 1999 킹 제임스 성경침례교회, 방언에 대한 소논문) 하지만 방언은 오순절 이후에도 결코 거두어진 적이 없었고 교회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적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께서는 방언을 은사로 내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 개개인과 교회의 영적부흥을 위해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적극 사모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사의 기록에 남아있는 방언을 살펴봅시다. 먼저 교부시대부터 중세교회 전까지입니다. 교부(敎父, Father of the Church)들은 방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교부는 ‘교회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초대교회이후 5-8세기경까지 교리(敎理)의 정립과 교회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들이 방언을 바라보는 입장들은 교회에 매우 중요한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 교부들의 기록을 통해 증언된 방언에 대한 입장들을 살펴봅니다. 1. 이레네우스 (Irenaeus, 137-ca. 202) 먼저 이레네우스 감독입니다. 그는 Lugdunum의 감독으로써 현재 프랑스 리용 지역에서 사역하였던 분입니다. 이 분은 순교자 폴리캅의 제자였고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였으니 우리는 이 분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이 분은 방언에 대해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숨은 비밀들을 방언을 통해 드러내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증언하기를,"같은 이유로 우리 역시도 교회에 있는 많은 형제들이 예언적 은사와 모든 종류의 언어들을 말하는 능력을 통하여 그것으로 여러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은밀히 감추어진 마음속의 비밀들을 드러내기도 하고 하나님의 신비함을 선포하기도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있다." Irenaeus, Against Heresies, 5. 6. 1. Ante-Nicene Fathers, vol. 1. eds. Alexander Roberts and James Donaldson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884), 531. 원문으로는 이렇습니다. "we do also hear (중략) through the Spirit speak all kinds of languages, and bring to light for the general benefit the hidden things of men, and declare the mysteries of God." 즉,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레네우스 당대에도 외국어 형태의 방언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료(史料)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서기 137년경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가 완성된 즉 요한계시록이 완성된 서기 95년부터 약 42년이나 지났으며그가 활약했을 시기를 20세 이상으로 잡는다면그가 방언을 증언한 그 시기는 신약성서의 완성보다도 최소 62년이나 지난 시기이며 이 기록물은 그 때에도 여전히 방언이 존재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노우호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은사중지론학자들이 주장하는 고전 13:10의 해석인 "온전한 것"은 신약성서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며 신약성서의 완성으로 표적은사들인 방언, 예언, 지식의 은사들이 그쳤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2. 교부 터툴리안 (Tertullian, A.D.160-220) 이번에는 교부 터툴리안의 증언을 살펴봅시다. 교부 터툴리안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순교에 감동하여 개종하였습니다.그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출생한 법률가로써개종 후에는 기독교 변증가로 활약하였습니다. 열렬한 믿음과 엄격한 도덕을 가지고 이단과 싸우고 특히 노스틱파와 맞섰습니다. 변증론과 말시온을 대항한 글이 유명하고그밖에도 30여 종의 논문이 있습니다.교부 터툴리안도 그 당시 교회 내에서 방언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책 "마르키온에 맞서 (Against Marcion)"를 통해 영지주의자 마르키온(A.D. 85-160 Marcion)에게 도전하면서 말하기를"마르키온(Marcion)에게 그가 섬기는 신의 은사들을 가지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하듯이 사람 마음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드러내거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해보라고 하십시오. 또한 그에게 방언을 통역할 때마다 영적 신비 속에서만 말하여지는 찬양과 비전과 기도들을 말해보라고 해보십시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른바 거룩한 여성들 가운데서 예언할 수 있는 여성이 있다면 내세워 보라고 하십시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영적인 은사들은 내가 속한 교회에서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자연스레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가르침, 교훈에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와 성령, 그리고 사도들은 모두가 다 우리 하나님께 속하여 있습니다." Tertullian, Tertullian Against Marcion, The Ante-Nicene Fathers, 10 vols. Alexander Rogers and James Donaldson, (Grand Rapids: William Eerdmans Publishing House, 1889), vol. 3, 446-447. 이러한 터툴리안의 증언을 미루어 볼 때에방언을 비롯한 예언 등 다른 성령의 은사들도 서기 3세기 초까지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오리겐(Origen, A.D. 185-254) 터툴리안과 동시대를 살던 오리겐도 당시에 방언이 사용되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셀수스(Celsus)라는 박식한 플라톤주의자가 기독교를 신랄하게 공격하였는데 셀수스는 기독교도 당시의 이교(異敎)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이때 오리겐은 셀수스에 맞서서 기독교 예언자들을 변호하였고 셀수스가 기독교 예언자들을 비판한 것을 재인용(再引用)하면서 반박하기를 "셀수스는(Celsus) 말하기를, ‘이러한 약속들에는 이상하고 광신적이며 전혀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quite unintelligible words)말들, 즉 이성적인 사람으로서는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는 그런 말들이 행하여지고 있다.’고 하였다. Origen, Origen Against Celsus, 7. 4. Ante-Nicene Fathers, vol. 4. eds. Alexander Roberts and James Donaldson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56), 614. 이처럼 오리겐을 통하여서도 당대 교회 안에서 방언이 사용되고 있었던 증거를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4. 노바티안 (Novatian, A.D. 257 사망) 코넬리우스(Cornelius) 대신 로마의 감독으로 선출된 노바티안도 자신의 저서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당시에 방언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성령의 일하심에 대하여 말하기를 "실로, 하나님은 교회에 예언자들을 보내시고, 교사들을 가르치시며, 방언의 은사들을 부어주시며 치유능력과 기적들을 나타내시고 그 밖에도 놀라운 이적들과 영 분별하는 힘을 주시고 조직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결정들이 반드시 이루어져야할 지를 알려주시고 주신 은사들에 질서와 조화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님의 교회를 여러 면에서 또한 세심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온전하고 완벽하게 해주십니다. Novatian, The Trinity, 29. 10. Translated by Russell J. DeSimone, The Fathers of the Church, vol. 67. Ed. Bernard M. Peebles (Washington, D. 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74), 101. 이로 볼 때 서기 3세기 중반에도 방언을 포함한 성령의 여러 은사들은 교회 내에서 계속하여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교회사속의 방언사례들을 통하여 우리는 방언이나 예언, 지식의 은사 등 이른바 고전 3:10의 "온전한 것"(신약성경)이 올 때에는 그칠 것이라고 말했던 각종은사들이 최소한 서기 3세기 중엽까지도 교회 안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음을 확연히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노우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예수님 재림할 때 끝날 것이 아니라 AD 100년 이전에 이미 위의 세 가지 은사는 끝났다. 이 문제를 가지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은 성경과 역사를 성실하게 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방검(105) 라고 말씀하신 내용은 호소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힐러리 (St. Hilary of Poitiers, A.D. 300-367) 지금의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벨기에 등을 포함한 지역인 가울(Gaul)의 감독이었던 힐러리는 그의 책, "삼위일체 (The Trinity)"에서 당시 일반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방언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서방의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of the West) 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당시 서방을 위협했던 아리우스주의 (Arianism) 즉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아리우스 Arius(250경-336경)의 이단설과 맞서 싸워 서방교회를 지켜냈습니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성부와 같은 실체가 아니며, 품격이나 영원성도 성부와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했던 심각한 이단이었는데 그러한 이단으로부터 서방의 교회를 지켜내어 지금도 성자로 추앙되는 정통 교부이었습니다. 이 힐러리 감독은 성령의 은사들을 하나씩 소개한 후 성도들은 신앙생활 가운데 이러한 은사들을 사용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어떤 이에게 지혜의 말씀을 주신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께서 지식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이에게는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침의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기적의 역사를,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신다. 이 모든 것들은 같은 한분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풍성한 영적 은사들을 사용하도록 하여야 한다." St. Hilary of Poitiers, The Trinity 2. 34-35. Translated by Stephen McKenna, The Fathers of the Church, ed. Roy Joseph Board, vol. 25. (New York: Fathers of the Church, Inc., 1954), 63. 감독 힐러리는 또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방언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 방언을 말하는 은사와 그것을 통역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행할 마땅한 일이며 사역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만드셨다." St. Hilary of Poitiers, The Trinity 8. 33., 301.이 사례(事例)를 통하여 볼 때 방언은 4세기 중반 경에도 교회 안에서 여전히 사용되었으며 나아가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6. 암브로우스(St. Ambrose, A.D.333-397) 이탈리아 북부의 중심도시인 밀라노(Milan) 감독이었던 암브로우스는 그가 서방교회에 끼친 신학적 영향력 때문에 이른바 "one of the four original doctors of the Church"라고까지 불리며아리우스주의에 맞서 싸웠고, 성 어거스틴에게끼친 영향력으로 인해 유명한 성자이었습니다.그는 자신의 저서 "성령 (The Holy Spirit)"에서 방언에 대해 말하기를 방언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증거중 하나이며 일반 기독교인들도 신앙생활 가운데서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Williams and Waldvogel, 68. Also see, Ambrose, The Holy Spirit, 2. 13. 150,152. Ed. Roy Joseph Deferrari, The Fathers of the Church: Saint Ambrose, translated by Roy Joseph Deferrari (Washing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63), 149-150. 이로볼 때 방언이 초대교회 이후 그쳤다는 노우호 목사님의 주장과는 달리 4세기 후반에도 교부들은 여전히 방언을 인정하고 그 사용을 성도들에게 권장하였습니다. 7. 파코미우스(St. Pachomius, A.D.292-346) 파코미우스는 어거스틴보다 약간 앞선 시대를 살면서 사막의 성자(聖者)로 불렸었는데 이 파코미우스가 특별한 이유는 그가 바로 공주(共住)수도원 (Communitarian monastery)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공주수도원이란 여러 수도사들이 함께 생활하는 대규모의 수도원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여러 수도자들이 함께 모여 살다보면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질서와 통제를 위한 규칙들이 저절로 필요해지겠지요. 이러한 수도원 규칙들을 최초로 만들고 정리한 사람이 파코미우스입니다. 그는 이집트 나일 강 상류의 타베니스(Tabennisis)에 서기 320년경 공주(共住)수도원을 설립하였으며 9개의 수도원에 무려 3,000명의 수도사들을 수용하며 사역하였습니다. 이때 그가 만든 수도원 규칙(Monastic Rule)은 역사상 최초의 수도원 규칙이 된 것입니다.이 규칙은 동방교회에 영향을 미쳐 카파도키아 수도사인 성 바실 (St. Basil)이 만드는 수도원 규칙과 나아가 서방교회에도 영향을 미쳐 성 베네딕트 (St. Benedict)가만드는 수도원 규칙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결국 파코미우스는 동·서양 수도원 운동에 기초를 놓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사막교부 파코미우스에게는 매일 많은 사람들이 그의 뛰어난 영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수도원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방에서 순례자들이 그를 찾아왔는데 이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집트인이었던 파코미우스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안타까웠던 파코미우스는 이 문제를 놓고 3시간동안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고 순례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파코미우스 수도원: 그 역사와 규칙"이라는 책을 번역해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파코미우스는 그들을 떠나서 홀로 기도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만일 제가 주님께서 땅 끝으로부터 보내신 그 사람들의 언어를 알지 못하여 도움을 줄 수 없다면 그들이 여기에까지 올 필요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오, 나의 주님, 만일 주님께서 저를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신다면 제게 은총을 내려주셔서 그들의 언어를 깨달아 그들의 영혼을 바로잡게 하여주시옵소서." 파코미우스는 이 일을 놓고 세 시간동안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이 때 갑자기 파피루스 종이에 쓰인 편지 같은 것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의 오른손에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읽자 파코미우스는 모든 언어들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께 찬양을 돌린 파코미우스는 큰 기쁨으로 그 형제들에게 돌아와서 부족함이 없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Paralipomena 11. 27. Pachomian Koinonia: Pachomian Chronicles and Rules vol. 2, translated by Armand Veilleux, (Kalamazoo, MI: Cistercian Publications Inc., 1981), 52. 영국의 가톨릭 사제이며 유명한 역사가인 앨반 버틀러(Alban Butler, 1710-1773)도 "파코미우스는 오랜 기도 끝에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배우지 않은 언어들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Alban Butler, The Lives of the Saints (Baltimore: Murphy & Co., 1889), vol. 2. 218. 또한 교회역사가 필립 쉐프 (Philip Schaff)는 "교회의 역사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에서 "여러 기록들은 파코미우스가 많은 기적들을 행하였고, 나아가 각종 방언과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을 행사하였다고 적고 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3.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10), 197. 이처럼 많은 기독교 역사가들은 파코미우스의 시대에도 여전히 방언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결국 이상의 기록들은 4세기 중반에도 여전히 방언이 기독교공동체 내에서 계속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증거들은 노우호 목사님이 주장하시는 방검(105) "이처럼 교회사에서도 일반적으로 방언 등표적의 은사들은 사도들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라는 주장은 더 이상 호소력이 없음을 강력히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8. 힐데가르드 (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성(聖) 베네딕트(St. Benedictine) 수도회의 수녀 원장이었던 독일의 힐데가르드(Saint Hildegard)는 예지적 능력을 가졌던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녀의 교회사적 중요성은 2012년 10월 7일에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Pope Benedict XVI)힐데가르트를 a Doctor of the Church로 추인(追認)한 것만 보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12세기경 인물로 8세 때 수녀원에 들어간 후 평생을 독일 라인 강 유역 빙엔에 있는 베테딕트 수녀원에서 살았습니다. 그녀는 1140년경부터 전례음악과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일반에 공개된 것은 그 후 10년이 지나서입니다. 힐데가르드는 "하늘의 계시에 의한 교향곡"을 발표한 데 이어 일종의 오페라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Ordo Virtium"과 미사음악을 비롯한 다수의 종교적인 작품들도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때로 이해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이것을 ‘성령의 음악’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노래 가사들이 이해되지 않는 말들로 이루어졌기에 그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종종 힐데가르드가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녀의 말년에 이르러 고위 성직자들은 수녀들이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지만 힐데가르드의 거센 항의를 받자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179년 3월에 그러한 금지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힐데가르드를 성녀(聖女, Saint)로 인정하고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작곡한 노래들은 음반으로 제작되어 오늘날도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녀가 방언으로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은 중세기인 12세기에도 방언이 계속하여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9. 도미니크 (St. Dominic, 1170-1221) (Angelus Clarenus, 1225-1337) 스페인 출신의 성인(聖人)이며 수도원 창설자였던 유명한 도미니크 성인도 방언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남부지역을 여행하던 중 이단인 카타리파(Cathars, 일명 알비파)에 대항하여 도미니크 수도원을 세웠습니다.본래 그의 모국어는 스페인어이었는데 어느 날 기도를 마친 후 독일어로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프란체스코(Franciscan) 교단의 수도사인 안젤로스 클라레너스도 기도 후 배우지 않은 그리스어와 이탈리아어를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George H. Williams and Edith Waldvogel, A History of Speaking in Tongues and Related Gifts, ed. Michael P. Hamilton, The Charismatic Movement,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5), 70. 10. 성녀 클레어와 성 안토니 (St. Clare of Montefalco, 1268–1308) (St. Anthony of Padua, 1195-1231) 어거스틴 수녀원의 수녀 원장이었던 성녀(聖) 클레어는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몬테팔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세 가지 기적적인 육체적 현상으로 유명한데 성령이 충만할 때 프랑스어로 말 할 수 있었습니다. Donald Attwater, A Dictionary of Saints, (New York: P.J. Kennedy & Sons, 1958), 59. 한편 파두아의 성자(聖者)로 불리는 안토니는 포르투갈의 가톨릭 사제이었으며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탁발승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의 파두아(Padua)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는 살아생전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모토를 생활 규칙으로 삼았던 수도사로 유명합니다. 그는 특별히 기적 행함과 설교로 인해 유명했는데 그 기적 중의 하나가 방언이었습니다. 그가 설교할 때에 청중들은 종종 마치 초대교회 오순절 날에 일어났던 기적과 같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그 설교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George H. Williams and Edith Waldvogel, A History of Speaking in Tongues and Related Gifts, ed. Michael P. Hamilton, The Charismatic Movement,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5), 71. 11. 빈센트 페레르 (Vincent Ferrer, 1350-1419) 빈센트 페레르는 지금의 스페인 자치주인 발렌시아 왕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도미니안(Dominican) 교단의 탁발승이었는데선교사와 논리학자로 유명하며 가톨릭에서는성자(聖者)로 추앙되는 유명한 인물입니다. 방언과 관련된 놀라운 기적들이 이 유명한 설교가요,선교사였던 빈센트 페레르에게서도 일어났습니다. 그는 스페인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라틴어로 설교하였는데 그 설교는 종종 그리스어, 독일어, 사르디니아 어(語)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섬의 언어), 헝가리어와 그 밖의 다른 나라말로도 들려 청중들은 마치 그가 자신들의 모국어로 직접 설교하는 줄로 착각할 정도이었습니다. Butlers, Lives of the Saints eds. Herbert Thurston and Donald Attwater vol. II (New York: Kennedy & Sons, 1962), 33. 이러한 여러 교회사적 기록들을 살펴볼 때 방언은 중세기에도 외국어 형태 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발성(Unintelligible utterance) 형태로 계속해서 일어났던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다양하고 명료한 자료들을 볼 때 노우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바(방검, 105) "(AD 100년 이전에)방언은 확실하게 끝났고 1901년 거짓 방언이 나올 때까지는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없었다."라고 말하신 내용은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노우호 목사님께서는 방검(105)에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도 표적은사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가르쳤다."고 말씀하시므로 마치 종교개혁 무렵의 신학자들은 모두가 당대 방언은사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2.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종교개혁의 아이콘인 마틴 루터는 마가복음 16:17-18에 기록된 이적(異蹟)들 곧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며, 방언을 말하는 이적들은 복음의 진실성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유대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쓴 "이사야 강해"에 보면 "이적(異蹟)들은 새로운 복음, 즉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약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필요하다. 이적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기위한 분명한 증거로써 필요했다." Martin Luther, Lectures on Isaiah, ed. Jaroslav Pelikan, Luthers Works vol. 16. (Sain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69), 302. 이 부분은 노우호 목사님께서도 인정하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노 목사님께서는 마가복음 16:17-18에 나타난 이적들의 지속성에 대해서는 부인합니다. 그래서 방검(18)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은 마가복음 16장 17절에서 방언의 은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가복음 16장에서의 예언되었던 방언은 은사(恩賜)가 아니라 표적(表迹)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표적(Sign)이 은사(gift)와 다른 점에 대해 방검(19)에서 설명하시기를 "표적이라는 것은 대개는 잠시 동안 보이다가 곧 그치는 현상(現象)이었다. 사도의 사도된 표적은 한 두 번이면 모든 사람들이 사도된 표적을 인식하게 된다. 매일같이 사도된 표적을 보여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결론으로 말씀하시기를, 방검(103)에 "아직 주님께서는 재림하시지 않았는데도 이러한 표적이나 은사들은 이미 오래 전에 폐하고 그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은 성실한 사람들이 아니다. AD 55년경에 방언은 그치게 되었고 지금까지 정상적인 교회 안에서는 전혀 없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영적은사들을 내려주신다고 믿었습니다. 루터는 당시 교회 내에서 영적 은사들이 일어나고 있던 것을 분명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시편 강해"에서 말하기를,"하나님께서는 사도, 예언자, 복음전파자, 교사, 방언 통역자, 다스리는 자를 주심으로 그의 나라를 유지하고 계신다.(Eph. 4:11). 어떤 이에게는 믿음의 은사, 다른 이에게 예언의 은사, 또 다른 이에게는 신유의 은사 (1 Cor. 12:8ff.)를 주신다. 이 다양한 은사들은 지금도 교회 안에 머물고 있으며 (This diversity of gifts remains in the church.) 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더 많이 받기도 한다." Martin Luther, Selected Psalms, ed. Jaroslav Pelikan, Luthers Works vol. 12. (Sain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69), 294-295. 이로써 루터는 당대 교회 안에 성령의 각종 은사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remains)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루터는 개인적으로 이미 여러 영적인 사건들을 경험하였습니다. 루터는 프리드리히 선제후(選帝侯)의 보호 하에 독일 튀링겐 주(州) 아이제나흐 근처에 있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城)에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무렵 (1521-1522)에 개인적으로 많은 영적공격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가 경험한 영적체험의 한 예(例)를 들어봅니다. "내가(루터) 창문 밖으로 내다보니 거기에 크고 검은 돼지가 마당을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어떤 돼지도 그 장소에는 들어 올수 없는 곳이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악령이었다. 어느 날은 나의 침대에서 개를 보았다. 나는 그것을 잡아가지고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 개는 짖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사람들에게 혹시 그 성에 개들이 사육되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 성의 집사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악령이라는 것을 알았다."Bengt R. Hoffman, Luther and the Mystics (Minneapolis, Minnesota: Augsburg Publishing House, 1976), 189. 이처럼 루터는 많은 영적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 친구의 병 치료를 경험하는 등 하나님의 이적(異蹟)에 매우 친숙하였습니다. 교회사가 호프만(Bengt R. Hoffman)은 이것을 두고 "루터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적 행하심을 믿었다."Bengt R. Hoffman, Luther and the Mystics, 19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교회역사가인 사우어스(Souers)는 루터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예언을 하기도 하였고 방언과 통역 등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경험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신학자 몰턴 켈시(Morton Kelsey)는 말하기를 "루터의 방언에 대한 역사가들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의심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 일은 루터가 수도원에서 최종 서원을 하기 전 두어해 동안에 걸쳐 체험했던 또 다른 영적경험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Morton Kelsey, Tongue Speaking: the History and Meaning of Charismatic Experience, 51. 라고 하였습니다. 위에 언급한 루터 자신의 가르침이나 증언, 그리고 여러 교회역사가들의 여러 자료들을 종합하여 볼 때 루터는 일상생활 속에서 이적(異蹟)에 친숙하였고 본인도 몇몇의 이적들을 직접 경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직접 방언을 했는지 여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루터는 당대에 방언을 포함한 성령의 모든 은사들이 존재함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루터의 사례연구를 통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무렵에도 성령의 여러 은사들은 여전히 교회 안에 존재했고 또한 사용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13. 루이스 버트랜드 (Louis Bertrand, 1526-1581) 스페인의 세 번째 큰 도시인 발렌시아 (Valencia)에서 출생한 루이스 버트랜드는 도미니카 수도회 소속 수도사로써 16세기에 남아메리카에서 복음을 전하였던 분입니다. 그는 가톨릭교회로부터 성자로 추앙되는 중요한 인물이며 "아메리카 대륙의 사도" "apostle of the Americas"라고 불리는 등선교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16세기 이후 많은 가톨릭교도들은 반동종교개혁과 세계선교 열풍을 타고서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 선교사들이 선교하면서 방언을 했다는 기록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 한 예로 도미니카 수도사였던 루이스 버트랜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본래 스페인어만 할 수 있었지만 방언의 은사를 받고난 후 선교지의 인디언 언어와 무어인(Moors)의 말로 설교할 수 있었다고 교황 클레멘트 10세(Clement X, 1590-1676)가 확인하였습니다. George H. Williams and Edith Waldvogel, A History of Speaking in Tongues and Related Gifts, ed. Michael P. Hamilton, The Charismatic Movement,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5), 74. 14. 프랜시스 자비에르 (Francis Xavier, 1506-1552) 현재 스페인 영토인 Kingdom of Navarre 나라의 Xavier 지역에서 태어난 프랜시스 자비에르는 사도 바울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일컬음을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인도와 실론, 말레이 반도를 거쳐 일본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선교지에서 한 번도 배우지 않은 타밀어와 인도네시아 방언으로 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George H. Williams and Edith Waldvogel, A History of Speaking in Tongues and Related Gifts, ed. Michael P. Hamilton, The Charismatic Movement,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5), 74 여러 기록들은 그가 방언의 능력을 받아 외국어를 말하였으며 그 밖에도 예언과 신유, 나아가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까지도 일으켰다고 말합니다. Alban Butler, Lives of the Saints eds. Herbert Thurston and Donald Attwater vol. 4. (New York: P. J. Kenedy & Sons, 1962), 478. Also see, John Coulson, The Saints: A Concise Biographical Dictionary (New York: Hawthorn Books, Inc., 1958), 190. See also, Omer Englebert, The Lives of the Saints translated by Christopher and Anne Fremantle (New York: David McKay Company, Inc., 1960), 460. 교황 그레고리 8세(Gregory XIII, 1502-1585)는 그의 시복식(諡福式)에서 자비에르의 방언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크게 공헌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Williams and Waldvogel, 74. 자비에르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과 가톨릭내의 증언들을 볼 때 자비에르는 성령의 각종 은사와 방언을 경험하고 사용하였음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15. 위그노 (Huguenot) 프랑스의 개신교도 칼뱅파(派)교도인 위그노 그룹에서는 방언을 포함한 여러 가지 영적 은사들이 다양하게 나타난 일로 유명합니다. 그동안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던 낭트칙령(Edict of Nantes)이 1685년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에 의해 철회되자 종교적 자유를 찾아 60만 명 이상의 개신교도들이 프랑스를 탈출하였습니다. 그들은 영국과 독일뿐 만 아니라 심지어 미국으로까지 망명하였는데 그 중 일부는 존 카발리어(John Cavalier)라는 농부의 지도를 받아 프랑스 군대가 추격하기 어려운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도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박해기간 동안 여러 기적들과 영적 은사들을 경험하였다고 알려졌는데 특히 그들이 받은 방언과 예언은 유명하여 심지어 그들을 박해했었던 자들도 그러한 이적들이 발생하였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Charles J. E. Kingston, Fullness of Power (London: Elim Publishing House, 1965), 170-171. 16. 퀘이커교도 (Quakers) 한국의 기독교 문필가이며 민중운동가로 유명한 고(故)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옹이 가입하여 한국인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알려진 퀘이커 교도는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폭스는 영국 잉글랜드 중앙부 레스터셔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교육은 전혀 받지 못하고 구둣방 견습공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19세 때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방랑하던 중, 1643년에 회심(回心:conversion)을 체험하였습니다. 1647년경부터 설교를 시작하였고 '진리의 벗'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웨일스 등지에서 전도하였습니다. 퀘이커파를 프렌드(friend)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폭스는 주로 중·하층 계급에서 많은 교도를 모았으며,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미국에까지 조직을 넓혀 나갔습니다. 이 교파는 폭스의 영향을 받아 영적인 일을 연구하는데 매우 열정적인 그룹이었습니다. 이 그룹의 멤버들이 열정적으로 기도하면서 몸을 마구 떨었으므로 이들을 퀘이커 (Quaker)즉, 떠는 무리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많은 초기 퀘이커교도들은 이들의 모임을 통해 성령세례를 경험하였고 방언도 받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William Henry Turner, Pentecost and Tongues: the Doctrine and History, (Shanghai, China: Shanghai Modern Publishing House, 1939), 110. 17. 카미자르(Camisards) 프랑스 루이 14세의 치세 말년(1702-04)에 남프랑스의 세벤누 지방에서 일어난 칼뱅파 신교도들을 지칭하는 말로써 이 세벤누 지방은16세기 이후 칼뱅파의 신앙이 확산되어서 남프랑스에서도 유수한 신교파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1685년 루이 14세는 낭트의 왕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들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했는데, 이 지방은 이러한 획일적 신앙 강요에 저항하였습니다. 이 카미자르는 성령에 의한 영감을 받는 것으로 유명하였는데 찰스 킹스톤(Charles Kingston)은 이들의 모임가운데 방언이 사용되었다고 말합니다. 세벤(Cevennes)의 복음주의자들이라고도 불린 이들은 18세기 초반에 큰 부흥을 경험하였는데 이때 방언과 예언도 나타났습니다.Charles J. E. Kingston, Fullness of Power (London: Elim Publishing House, 1965), 171. 이들은 종종 영적 감동에 빠져 아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곤 하였는데 그중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통역의 은사를 받아 이것을 통역할 수 있었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에도 철학자 볼테르(Voltaire, 1694-1778)가 카미자르의 방언현상을 관찰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몇몇 카미자르들은 영적 충만함이 지속되는 가운데 유창한 프랑스어로 위그노 성경에 대해 말하였는데 이런 일이 때로는 두 시간 이상 지속되기도 하였으며 그러한 영적 감동이 끝나고 나면 방언을 했던 사람은 다시 그의 모국어로 말하였다고 합니다. Encyclopaedia Britannica, ed. W. H. Depuy 9th Edition Vol. 4 (Chicago, IL: The Werner Company, 1896), 745. 18. 모라비아 형제단(Moravian Brethren) 모라비아 형제단은 15세기 경 체코의 동부인 모라비아(Moravia)와 서부인 보헤미아(Bohemia) 지방에서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활동했던 요한 후스(Johannes Huss, 1369-1415)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습니다. 존 후스라고도 불리며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에 위치한 프라하 대학 총장으로도 재직하였던 요한 후스는 종교개혁자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규정한 가톨릭 교권에 맞서 대항함으로 인해 파문당하였고 마침내 교회론, 성만찬의 논쟁으로 가톨릭의 박해를 받아 화형을 당하면서도 그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이러한 요한 후스의 가르침을 따라 세워진 모라비안 그룹은 가톨릭의 반(反)종교개혁과 30년 전쟁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1727년경 독일에서 진첸도르프(Zinzendorf) 백작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섰습니다. 이들은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였는데 이들의 헌신적인 예배와 신앙, 그리고 선교적 열정등은 당시 사방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들 모라비아 형제단의 기록을 보면 그들은 18세기 무렵, 그들을 반대하는 자들로부터 종종 방언하는 자들이라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방언은 마치 모라비아 교도들의 특징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사용되었습니다. George H. Williams and Edith Waldvogel, "A History of Speaking in Tongues and Related Gifts," in The Charismatic Movement, 77. 이러한 교회사속의 다양한 기록들을 볼 때 방언이 초대교회 이후 그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제와 주석이 잘못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9.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당대에 끼친 커다란 영적 영향력으로 인해 오늘날의 오순절 신학자들에 의해 ‘근대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the father of the Pentecostal movement) 라고까지 불리는 분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초대교회 이후에도 방언과 다른 모든 은사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교회에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2-3세기 이후로는 영적은사들이 점차 사라져 버렸는데 이유는 그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믿음과 거룩함을 잃었고 더 나아가 메마르고 형식적이고 진부한 종교생활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결국 많은 영적은사들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은 당시의 교회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영적 은사들을 비웃어 말하기를 "그것들은 미친 짓이거나 사기나 협잡이라고 헐뜯으며 배척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John Wesley, The Journal of the Rev. John Wesley ed. Nehemiah Curnock vol. 3. (London: The Epworth Press, 1938), 490. 이러한 웨슬리의 진단을 오늘 현대 한국교회는 깊이 있게 새기고 명심하며 또 다시 이러한 교회사속의 오류를 반복하게 하려하는 은사중지론자들의 잘못된 주장을 막아야하겠습니다. 웨슬리는 설교, "더 훌륭한 길"에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잃어버린 AD 2-3세기 시대의 교회에 대하여 말하기를,"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이교도들과 비교한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영을 더 많이 알거나 모시고 있었다고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 때의 기독교인들은 이미 내용면에서 이교도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다만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죽은 껍질만이 남아있었을 뿐 이었다." John Wesley, The Works of the Reverend John Wesley ed. John Emory vol. 2. (New York: B. Waugh and T. Mason, 1835), 266. 이처럼 웨슬리는 영적 권위와 성령의 은사를 잃어버리고 무력해진 2-3세기 이후의 교회 모습을 생각하면서 매우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이처럼 교회가 잃어버렸던 성령의 영적은사와 능력들이 자신의 시대에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바랐으며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전심으로 노력하였습니다. 웨슬리는 그의 시대에 일어난 방언에 대한 소식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들턴(Dr. Middleton)이 "방언은 사도시대 이후에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사라져버려 그 후로는 기독교의 전체 역사를 통하여 더 이상 어떤 방언의 사례도 찾아볼 수가 없다."Conyers Middleton, A Free Inquiry into the Miraculous Powers, (London: Printed for R. Manby and H. S. Cox, 1749), xxi. 고 주장하자 그에게 장문(長文)의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습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 사이에도 방언이 일어났던 사실들은 줄곧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방언이 일어난 곳은 영국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니고 또 아주 먼 옛날의 일도 아닌 바로 최근입니다. 다피니 계곡(valleys of Dauphiny)에서 (주, 위그노들이 머물렀던 곳) 여러 차례 방언이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던가요? 계곡에 살던 이들 개신교 거주자들이 이 은사(방언)와 다른 기적적인 능력들을 행한다는 소식이 크게 알려져 (프랑스) 파리에 큰 소동이 일어난 것은 불과 50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John Wesley, The Letters of the Rev. John Wesley, ed. John Telford, (London: The Epworth Press, 1931), 365. 이처럼 웨슬리는 성령의 모든 영적인 은사들이 어느 시대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또한 이러한 모든 영적은사들이 자신의 시대에 속히 회복되어야 한다고 사모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 자신도 성령의 능력을 그의 사역가운데 경험하고 사용하였습니다. 웨슬리의 일기를 살펴보면 여러 곳에서 이러한 성령의 역사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772년 6월 6일(토) 나는 뉴캐슬(Newcastle)부근의 여러 마을에서 설교하였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다시 선더랜드(Sunderland)로 돌아갔다. 그 저녁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확장을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예배가 마쳐질 무렵 나의 마음에 그 지역의 유명한 인사 중 믿음을 떠난 어떤 이가 갑자기 강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소리쳐 외치기를 "주님, 사울도 예언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이 와 있습니까? 만일 그가 있다면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이 소리를 들은 제임스 왓슨은 마치 돌덩이처럼 바닥에 쓰러졌으며 그는 누운 채 하나님의 긍휼함을 간절히 호소하면서 부르짖었다. JOURNALS of John Wesley, June. 6, 1772 이와 같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들은 웨슬리 목사의 사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보면, 1739년 4월 30일 (월) 우리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며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이들 중에는 어떤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일들이 사기나 협잡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오늘 내가 뉴게이트에서 설교하는 가운데 한 여인이 (하나님의 임재가 일어나자) 강하게 부르짖으며 눈물을 쏟았다. 그 여인은 이 의사가 몇 년간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그 의사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믿기가 힘들었다. 그는 여인의 곁에 가서 일어나는 모든 증세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커다란 땀방울이 여인의 얼굴을 타고 흘렀으며 몸의 모든 뼈들이 뒤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고 난 후 이제껏 가졌던 의심을 버리고 되었고, 이러한 일들은 결코 사람이 만들어낸 사기행각이거나 혹은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기의 눈앞에서 그녀의 몸과 영혼이 순식간에 치료되는 것을 보고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JOURNALS of John Wesley, April. 30, 1739 이러한 여러 기록들을 미루어 볼 때 요한 웨슬리는 여러 영적은사들과 방언이 그의 시대에 나타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고 그 은사들을 사용하도록 권고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실제로 감리교도들 가운데 방언을 사용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보면 감리교의 개종자들 사이에서 종종 방언하는 일이 발생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Encyclopaedia Britannica, 14th Edition., Vol. XXII. (Chicago: The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1973), 283. 또한 웨슬리의 중요한 동역자중의 한 사람이었던 토머스 웰쉬(Thomas Walsh)는 1750년 3월 8일자의 일기에 방언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주님께서는 내가 아지 못하는 언어를 주시어 나의 영혼이 그 분을 향하여 놀랍도록 고양되며 힘차게 일어서게 하셨다."Charles J. E. Kingston, Fullness of Power (London: Elim Publishing House, 1965), 177. 이상의 기록들을 통하여 18세기 침몰하는 영국을 구원하는 유일한 배역을 맡았다고 평가되는 요한 웨슬리 목사님도 방언과 성령의 모든 은사를 인정하였고 또한 그 사용을 적극 권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우호 목사님께서는 방검 (52)에서 말씀하시기를"분명한 사실은 고린도 교회 방언사건이 수습된 후1900년 교회 역사 중에 정통교회에서는 방언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대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기독교 역사에 존재하지 않던 방언이 왜 그들에 의하여 다시 나타났는지에 대해서 합당한 근거로 증명을 해야만 한다." 라고 말씀하셨으며 방검(28)에는 교부 이레네우스(137-ca. 202)를 언급하시면서 이레네우스는 매우 신뢰할 수 있는 인물임을 강조하시는 긴 주석도 달아놓으셨습니다. 노우호 목사님께서는 방언이 그쳤다는 시점을 신약성경이 완성된 시점인 AD 95년으로 보시지만 우리가 이미 교회사를 통하여 살펴보았듯이 이보다 무려 62년이 지나 활동을 시작한, 교부 이레네우스, 노우호 목사님께서 신뢰하시는 그 이레네우스 조차 당대(當代)에 방언이 존재하였다는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사 가운데 방언이 계속적으로 주어졌다는 증거를 수없이 찾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로써 교회역사는 방언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주장하시는 노우호 목사님의 논지는 그 호소력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20. 드와이트 무디 (Dwight Llyman. Moody, 1837-1899) 방언은 시카고 부흥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드와이트 무디(D. L. Moody)목사의 부흥집회에서도 일어났습니다. 1875년 무디 목사가 런던의 빅토리아 홀에 있는 Y. M. C. A.모임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 몇몇의 젊은이들이 방언을 하였습니다. 이 사건 뿐 아니라 무디 목사의 또 다른 집회에서도 계속해서 방언이 일어났었던 기록들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Vinson Synan, The Holiness Pentecostal Tradition: Charismatic Movements in the Twentieth Century,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7), 88. 예를 들어, 1873년 무디 목사가 영국의 선더랜드를 방문한 후 로버트 보이드라는 사람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집회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다. 젊은이들이 방언을 했고 또 예언을 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디가 오후 내내 그들에게 설교를 했다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John Sherrill, They speak with other tongues,(Chappaqua, New York, Chosen Books LLC), 한국어 번역본, 성령님을 찾아서, (배응준 역, 규장2007), 135쪽. 21. 클리블랜드 하나님의 교회 교단 (Church of God, Cleveland) 침례교회에서 세운 경건주의 운동그룹인 크리스천 연합(The Christian Union)은 미국의 테네시 주(州), 노스캐롤라이나 주, 조지아 주가 모이는 산악지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이들은 1896년경, 10년간의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그 동안 사모해왔던 부흥을 마침내 경험하였습니다. 이 부흥운동기간에 많은 성도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방언은 이 부흥운동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임은 점점 성장하여 마침내 미국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는 클리블랜드 하나님의 교회교단이 되었으며 근대 이후로 가장 오래된 오순절 교단이 되었습니다. George H. Williams and Edith Waldvogel, A History of Speaking in Tongues and Related Gifts, ed. Michael P. Hamilton, The Charismatic Movement,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5), 95. 22. 찰스 파함과 벧엘 성경학교 (Charles F. Parham, 1873-1929) 찰스 파함과 그의 성경학교는 근대 최초의 방언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미 앞서 살펴보았듯이 찰스 파함의 성경학교 이전에도 방언은 계속해서 일어났고 성령의 임재 속에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찰스 파함의 성경학교는 근대 오순절 운동의 상징적인 시발(始發)점이 되는 중요한 곳이기에 사람들에게는 이 곳에서 일어난 방언이 마치 근대 최초의 방언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이후 근대 성령운동의 큰 사건으로 여겨지는 아주사 부흥운동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기에 방언에 대한 단순한 기록 외에 좀 더 자세히 교회사의 기록들을 통해 조명해 보겠습니다. 벧엘 성경학교(Bethel Bible College)는 1900년, 미국 캔사스(Kansas) 주(州)의 토페카(Topeka)에 세워졌으며 찰스 파함이라는 젊은 감리교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특별히 근대 오순절 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Nils Bloch-Hoell, The Pentecostal Movement: its Origin, Development, and Distinctive Character, (New York: Humanities Press, 1964), 18. 당시 찰스 파함 목사는 자신의 신앙생활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결단했습니다.그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통독하면서 자신의 나약함과 초대교회 신자들의 강력한 능력을 비교하며 1세기의 크리스천들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교회에는 없는 능력의 비밀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습니다. 왜 자신의 교회에는 새신 자들이 없는 것일까? 왜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질문하고 또 질문하였습니다. John Sherrill, They speak with other tongues, (Chappaqua, New York, Chosen Books LLC),한국어 번역본, 성령님을 찾아서, (배응준 역, 규장2007), 59쪽. 파함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캔사스 주 토페카에 Stone's Folly라는 건물을 빌려 무료성경학교를 설립하였고 각지에서 40명의 학생들이 몰려와 함께 숙식하며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찰스 파함과 그의 학생들은 성경을 읽고, 설거지를 하고, 소젖을 짜고, 기도하고 성령이 임재하시는 명확한 증거를 찾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1900년 12월말경 교장 파함 목사는 잠시 동안 전도 집회를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그 동안 그 성경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 받은 증거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이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다 결국 모두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한 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성령 받은 증거라는 일치된 결론을 내렸습니다. George H. Williams and Edith Waldvogel, A History of Speaking in Tongues and Related Gifts, ed. Michael P. Hamilton, The Charismatic Movement,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5), 97. 그 후 여행에서 돌아온 파함 목사도 이들의 대답을 듣고 그 의견에 동의하였습니다. 이렇게 얻어진 결론은 점점 교리화 되었는데 결국 마침내 "방언은 성령세례를 받은 최초의 증거"(The initial evidence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라는 초기 오순절 교단의 특별한 교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오순절 교단의 초기 교리는 다른 교단과 많은 마찰을 빚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즉, 방언을 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 되는 교리가 되므로 다른 교단으로부터 이단사상이라는 비난까지 받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성경의 일부분만을 바탕으로 주장된 것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교리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부분적으로 읽고서 깊은 연구 없이 단순하게 결론 내렸던 지극히 단순하고 순진한 (Naive) 결론이었습니다. 파함 목사가 이런 주장을 했던 것은 오순절 신학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았던 시기에 개인적으로 강조했던 초기 오순절 교리이었을 뿐 현재는 이러한 교리를 주장하는 오순절교단은 거의 없습니다. 여기서 간략히 요약해보면 사도행전에는 성령께서 임하셨다는 기록이 여섯 차례정도 나오는데 이중 절반인 셋의 경우에는 성령세례와 함께 방언이 일어나고 나머지 셋의 경우에는 방언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방언은 성령임재의 증거가 될 수도 있지만 성령 임재시 반드시 따라와야 하는 유일무이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초기 오순절 교단의 교리가 수정되어 오늘날에는 방언 외에도 성령의 다른 은사들이나 열매들도 성령임재의 증거로 보는 은사주의 (Charismatic)교단의 교리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서 1900년 12월 31일 오후 7시 새해맞이 예배를 맞은 벧엘 성경학교의 한 여학생 아그네스 오즈만(Miss. Agnes Ozman)은 성령을 받으며 방언을 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안수해 줄 것을 찰스 파함에게 요청하였습니다. 찰스 파함은 그런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짧게 기도한 후에 천천히, 부드럽게 두 손을 오즈먼 양의 머리에 얹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오즈먼의 입에서 두 사람 중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낯선 말들이 터져 나왔습니다.John Sherrill, They speak with other tongues,(Chappaqua, New York, Chosen Books LLC), 한국어 번역본, 성령님을 찾아서, (배응준 역, 규장2007), 66쪽. 그리고 이어서 거기 있던 다른 학생들도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George H. Williams and Edith Waldvogel, A History of Speaking in Tongues and Related Gifts, ed. Michael P. Hamilton, The Charismatic Movement,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5), 97 1901년 1월 3일에는 교장인 파함 목사도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Nils Bloch-Hoell, The Pentecostal Movement: its Origin, Development, and Distinctive Character, (New York: Humanities Press, 1964), 21. 그리고 이때 다양한 교파에서 온 열 두명의 목회자들도 그 성경학교 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시작했습니다. John Sherrill, They speak with other tongues,(Chappaqua, New York, Chosen Books LLC), 한국어 번역본, 성령님을 찾아서, (배응준 역, 규장2007), 67쪽. 이 일이 일어난 후 파함 목사는 방언이 열광적이고 신비를 사모하는 특별한 신앙공동체뿐 아니라 일반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주어질 수 있으며 또한 예배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Vinson Synan, The Holiness Pentecostal Tradition: Charismatic Movements in the Twentieth Century,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7), 89. 이렇게 시작된 근대 토페카의 방언은 이 후 여러 교단과 언론의 특별한 조명을 받으며 큰 관심거리가 되는 동시에 논란의 이슈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이 사례를 통하여서도 방언이 교회사 속에일어났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3. 웨일즈 부흥운동(Welsh revival, 1904-1905) 1904년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근대에 일어난 성령운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반 로버츠(Evan John Roberts, 1878-1951) 목사에 의해 1904년 10월 마지막 날 시작된 이 부흥운동은 그해 말 불과 2개월 내에 3만 2천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였고5개월 내에 10만 명의 웨일즈 주민들이 회심하게 하였으며 그 후로는 영국의 다른 지역을 포함하여 스칸디나비아, 유럽, 아프리카, 북미대륙, 호주, 인도, 아시아, 및 라틴 아메리카 등 거의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는 놀라운 부흥을 가져왔습니다.에이비온 에번스 저 (윤석인 역), 1904 웨일즈 대부흥,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5), 106-107, 163, 184 쪽 방언은 이 웨일스 부흥운동에서도 일어났었는데 1904년 12월 17일자 요크쇼어 신문은 (Yorkshire Post) 이반 로버츠가 인도한 부흥회에서 젊은 남자들과 여성들이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언어들을 말하기 시작하였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부흥운동에 참여했던 한 네덜란드 목사는 심지어 설교 전체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영어로 설교하기도 하였습니다. Vinson Synan, The Holiness Pentecostal Tradition: Charismatic Movements in the Twentieth Century,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7), 89. 24. 아주사 부흥운동 (Azusa Street Revival, 1906-1910, roughly 1915) 1906년 4월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의 아주사 거리(Azusa Street, 312)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Vinson Synan, The Holiness Pentecostal Tradition: Charismatic Movements in the Twentieth Century,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7), 84-85 땅딸막한 애꾸눈의 흑인 설교가 윌리엄 시모어(William J. Seymour, 1870-1922)가 중심이 된 이 부흥운동은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방언이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부흥운동은 근세 교회역사 속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이 부흥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좀 자세하게 기록하여 보겠습니다. 앞선 편에서 말씀드렸던 찰스 파함 목사는 캔사스 토페카에서 방언을 경험한 후 성령이 충만해져 학생들과 함께 미국 전역과 캐나다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복음을 전파하자는 대대적인 선교여행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미국전역을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지만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많은 지역의 목회자들과 신문들이 헐뜯고 비난하며 강단에 설 기회조차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후원을 받을 수가 없어 어려움에 봉착하다가 마침내 선교단을 해체하고야 맙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 토페카로 돌아온 파함 목사는 이번에는 성경학교로 사용하던 건물이 팔리게 되어 성경학교조차 해산하고야 말았습니다. 이 후에도 계속해서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던 파함 목사는 1903년에 미국 미주리 주의 엘도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휴양지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기도하였는데 그 때 메리 아더(Mary Arthur)라는 여성이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하고 자기 집인 캔사스 갈레나로 돌아가 파함 목사를 초청하므로 그 곳에 가서 치유집회를 열게 됩니다. 파함 목사는 갈레나에서 성령세례로 충만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 (Full Gospel, 방언이나 치유나 성령의 어떤 은사도 빼놓지 않는 온전한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파함의 각오를 반영한 그 자신의 표현) 을 전하였습니다. 이때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의 일간지 인콰이어러 (Inquirer)의 기자가 기록한 내용을 보면, "1904년 1월 27일, (중략) 파함 목사가 갈레나에서 집회를 시작한지 겨우 3개월이 되었지만 그 동안에 수천 명의 환자를 치유했으며, 8백 명 이상의 회심 자를 얻었다." 목발환자들이 목발을 내던졌고, 외국어 방언도 일어나 한 부인이 방언으로 말하자 포니 인디언 보호구역 (Pawnee Reservation)에서 온 어떤 인디언이 그 말하는 것 전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John Sherrill, They speak with other tongues, (Chappaqua, New York, Chosen Books LLC), 한국어 번역본, 성령님을 찾아서, (배응준 역, 규장2007), 68-70 갈레나에서 3개월간 말씀을 전하였던 파함 목사는 1905년 텍사스 주 휴스턴으로 이주하여 "성경훈련학교(The Bible Training School)"라는 성경학교를 세웁니다. 파함 목사는 이 학교에서 가르치기를 오늘날에도 오순절 성령운동 같은 성령의 일하심이 계속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주사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윌리엄 시모어는 바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당시에는 흑인 학생이 백인학생과 한 교실에서 배울 수 없는 인종차별적 규정 때문에 함께 공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파함 목사의 배려로 복도에 의자와 책상을 들여 놓고 교실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파함 목사의 강의를 들어가면서 공부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모어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이 신학교를 방문한 여(女) 성도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초청으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로스엔젤리스에서 시작한 첫날 집회에서 시모어는 방언과 그 밖의 성령의 은사들은 오늘날에도 그것들을 사모하며 구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질 수 있다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에 거부감을 느낀 초청 교회에서는 다음날 즉시 그 집회를 중단시키고 시모어를 내쫓았습니다. 쫓겨난 시모어는 그 교회 성도 중 하나였던 은행 청소부 에드워드 리(Edward S. Lee)의 집에 초대받아 그 곳에 머물렀으며 자신의 메시지에 관심을 갖고 따르는 일부 성도들과 함께 역시 청소부였던 리처드 에즈베리(Richard Asbery)의 집에서 계속해서 기도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1906년 4월 9일 밤, 예배하는 가운데 거기 모인 모두가 성령의 강한 임재를 경험하고 시모어와 다른 일곱 명의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닥에 쓰러졌고 일부는 방언을 하였습니다.그 중 거리로 쫓겨난 시모어를 집으로 초대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가르침을 믿지 않았던 에드워드 리가 제일 먼저 방언을 경험하였습니다. Vinson Synan, The Holiness Pentecostal Tradition: Charismatic Movements in the Twentieth Century,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7), 96 그리고 이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3일 후인 1906년 4월 12월 시모어도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Nils Bloch-Hoell, The Pentecostal Movement: its Origin, Development, and Distinctive Character, (New York: Humanities Press, 1964), 35. 이러한 소문이 퍼져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점점 모임 장소가 비좁아지게 되자 과거 흑인감리교회 건물로 사용되다 이후 가정집 겸 조합 건물로 사용되던 아주사 거리의 2층 건물을 임대하여 모임의 장소로 삼았습니다. 시모어는 자연스레 이 부흥운동의 핵심인물이 되었으며 이후 3년 반 동안 지속된 아주사 부흥운동의 중심인물로 일하였습니다. 시모어는 당시 사회적으로 천대받았던 흑인이었고 한쪽 눈도 천연두로 잃었으며 얼굴도 얽어 흉한 모습이었지만 하나님은 겸손한 그를 들어서 사용하셨습니다. 이 부흥운동 중에는 매일 하루 3번씩 집회를 열었으며 이러한 모임은 3년 반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성령의 일하심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였으며, 병자들이 기적적으로 치유되고,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났으며 귀신들이 쫓겨나가는 일이 매 집회 때 마다 일어났습니다. 또한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이 소식을 듣고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도 성령 충만을 받고 고국에 돌아가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시모어는 이 부흥운동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초대교회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후 방언을 했듯이 오늘날에도 성령 받은 사람들은 방언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Nils Bloch-Hoell, The Pentecostal Movement: its Origin, Development, and Distinctive Character, (New York: Humanities Press, 1964), 35. 그의 방언에 대한 설교는 기존의 교파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 후 방언은 또 다른 부흥집회에서도 계속해서 일어나서 마침내는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성령의 은사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Nils Bloch-Hoell, The Pentecostal Movement: its Origin, Development, and Distinctive Character, (New York: Humanities Press, 1964), 34-41. 이와 같은 아주사 부흥 운동을 계기로 방언은 대부분의 미국 오순절 부흥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Stanley Howard Frodsham, With Signs Following: the Story of the Pentecostal Revival in the Twentieth Century, (Springfield, Missouri: Gospel Publishing House, 1946), 41-51 25. 세계 각국의 부흥운동 아주사 부흥운동이 일어난 후 이와 비슷한 부흥운동들이 미국 전역에서 발생하였습니다. Vinson Synan, The Holiness Pentecostal Tradition: Charismatic Movements in the Twentieth Century,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7), 98. 그리고 아주사 이후 캐나다, 영국,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인도, 중국, 한국, 이집트,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중부 아메리카 등 세계 각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부흥운동이 계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들 부흥운동에서는 공통적으로 방언과 여러 영적은사들이 다양하게 주어졌으며 이러한 은사들은 각각의 부흥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Stanley Howard Frodsham, With Signs Following: the Story of the Pentecostal Revival in the Twentieth Century, (Springfield, Missouri: Gospel Publishing House, 1946), 53-228. 26. 가톨릭 은사 운동 가톨릭 은사운동은 현대의 성령운동가운데서도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 중의 하나이며 이 은사운동에서도 방언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가장 큰 가톨릭대학인피츠버그 듀케인 대학 (Duquesne University)의 평신도 신학 교수이었던 랄프 키퍼(Ralph Kiefer)와 빌 스토레이(Bill Storey)는 1966년 경, 성령을 사모하던 중 장로교 기도모임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서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크게 용기를 얻은 이들은 가톨릭 내에서도 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기를 사모하면서 준비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67년 2월 17일부터 19일 사이에 20여명 가량의 교수들과 부인들 그리고 대학원생들이 모여 최초의 가톨릭 오순절 기도모임을 가졌습니다. 기도모임 둘째 날에는 '방주와 비둘기'(The Ark and the Dove)라고 불리는 강당에서 기도회를 가졌는데 참석한 이들은 오순절 날 임했던 성령 충만을 받기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 때 참석한 모두에게 성령세례가 임하였고 동시에 방언과 영분별, 예언, 지혜 등 여러 영적은사들이 일어났습니다.Vinson Synan, The Holiness Pentecostal Tradition: Charismatic Movements in the Twentieth Century,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7), 246-247. 이 날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던 데이비드 맨갠(David Mangan)은 증언하기를"나는 내 일생의 그 어떤 통곡 때보다도 더 크게 울부짖었지만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순간 예수께서 실제로 임재 하셨고 그 때 나는 온 사방에서 그 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분의 크신 사랑이 나를 압도하였다."Synan, The Holiness Pentecostal Tradition: Charismatic Movements in the Twentieth Century, 246. 또 다른 참석자 패트리샤 갤라거(Patricia Gallagher)는 말하기를"그 날 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예배당으로 불러 모으셨다. (중략) 우리 중 몇 몇은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이들은 영분별의 은사를 받았고 예언과 지혜의 은사를 받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크고 중요한 선물은 사랑의 열매로써 우리 모임 전체가 사랑으로 하나가 됨을 느꼈다. 주님의 영께서는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사모해왔던 하나 됨을 이루어주셨다." Synan, The Holiness Pentecostal Tradition: Charismatic Movements in the Twentieth Century, 247. 이후 가톨릭 오순절 성령운동은 인디아나 주(州) 사우스 벤드(South Bend)에 있는 노트르담 대학(Notre Dame University)에까지 번져갔으며 그곳에서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한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일어나면서 가톨릭 성령운동은 마침내 미국 전역과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가톨릭 오순절 성령운동은 1967년 이후 매년 거의 3배씩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가톨릭 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부흥운동이 되었으며 1974년에는 그 명칭을 '가톨릭 오순절 운동'에서 '가톨릭 은사주의 운동'으로 바꾸었습니다.이처럼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던 가톨릭 은사주의 운동은 마침내 로마에까지 이르러 1975년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 25,000명의 성령 충만한 가톨릭 신자들이 모였으며 교황 바오르 6세가 인도하는 이 집회에서 "성령 안에서 노래하자"는 찬양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이러한 가톨릭의 은사부흥운동은 결국 다른 교단에도 영향을 끼쳐 결국 많은 교단에서 오순절 성령 부흥운동을 받아들이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7. 미국 대표교단들의 입장 변화 1970년 미국 장로교단(United Presbyterian)은 미국 내 주요교단들 가운데 첫 번째로 성령은사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내고 이 운동에 신학적인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Synan, The Holiness Pentecostal Tradition: Charismatic Movements in the Twentieth Century, 257 그 보고서에는 방언에 대해서 "방언을 하는 것이 멸시되거나 금지되어져서는 안 되며 반대로 지나치게 강조되거나 또는 크리스천의 신앙규범처럼 여겨져서도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보고서의 전체 복사 본을 보시려면 McDonnell, Kilian. Presence, Power, and Praise.,vol. 1 New York: Paulist Press, 1980. 207-210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미국 장로교단의 은사운동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움직임은 다른 교단에도 영향을 미쳐 1971년에는 감독교회 (Episcopal Church), 1973년에는 미국 루터교회 (The American Lutheran Church), 1974년에는 미국 루터교단(The Lutheran Church in America) 에서도 비슷한 보고서를 내고 '방언이 오용될 가능성도 있지만 방언을 말하는 이들이 자기 교단 내에서 배척되어져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연합감리교회 (United Methodist Church)에서는 1976년에 보고서를 내고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 교단 내에서 얼마든지 언제든지 환영될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미국 로마가톨릭 성직자단도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긍정적이고 지원적인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가톨릭 성직자단은 1969년에 발표된 감독들의 보고서(Bishops' report)에 명기된 "이러한 은사운동이 (가톨릭 내에서) '억눌려지는대신 개발되도록 허락되어져야'(should not be inhibited but allowed to develop)한다는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세계교회연합 WCC (World Council of Churches)도 1980년에 성령은사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내고 이 운동을 "희망의 징조(A sign of hope)"라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Synan, The Holiness Pentecostal Tradition: Charismatic Movements in the Twentieth Century, 259. 28. 은사운동에 대한 놀라운 태도변화 전 세계의 교회들은 1995년에 하비 콕스(Harvey Gallagher Cox, 1929-)가 출간한 오순절 운동에 관한 저서인 "하늘로부터 임한 불" (Fire From Heaven)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콕스는 이 책에 “오순절 영성의 융성과 21세기 종교의 변화(The Rise of Pentecostal Spirituality and the Reshaping of Relig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라는 부제목을 달아 오순절 운동이 미래의 기독교에 얼마만큼의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강조하였습니다. 콕스는 1960년대에 "세속도시(The Secular City)"라는 책을 써서 미래사회에 일어날 여러 현상 중의 한 가지로 종교의 종말을 꼽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30년이 지난 후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부흥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콕스는 오순절 운동을 연구하였고 마침내 미래 기독교의 운명은 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여러 은사와 능력에 의지하는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에 달려있다는 획기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콕스가 그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근거는 1901년 근대성령운동이 불과 40명으로 시작되었는데 100년이 지난 2000년에 이르자 전 세계적으로 은사주의 크리스천이 5억 5천만 명으로 증가하였기 때문입니다.Synan, The Holiness Pentecostal Tradition: Charismatic Movements in the Twentieth Century, 279-281. 이상과 같이 교회사속에 나타난 방언사례연구를 통하여 살펴 본 결론은, 방언은 초대교회이후에도 그쳐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개인과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때때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방언이 비판받거나 부정되어진 적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은 결코 그쳐지지 않았고 역사의 각 시대마다 계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 성경의 증거(주석편) (1) 고전 14:21-22절 방언에 대한 성경주석을 통하여 노우호 목사가 주장하는 바, 방검(25)"현대교회의 방언은 고린도의 방언과 같이 거짓이다."라는 말이 과연 사실인지의 여부를 살펴보겠다. 노우호 목사의 주장을 모든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게 좀 더 부언(附言)하여 설명해보면 이렇다. 노 목사는 방검(24-25)에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는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는 날에 나타난 표적(表迹)으로서의 방언은 당시 15개국에서 사용되는 실제적인 언어였다. 그러나 작금의 오순절 교단이나 신비주의자들이 받으라는 방언은 전혀 외국어가 아니고 아무도 알아들을 수없는 이상한 소리에 불과하다. 오늘날 교회의 방언현상을 오순절 운동이라고 하려면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듣는 외국어 방언의 표적이 나타나야 한다. (중략)따라서 오늘날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방언기도 운동을 '오순절 운동'이 아니라 '고린도 운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인편(人便)으로 듣고 외국어를 잘할 수 있는 은사(恩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러한 편지(고린도전서)를 쓰게 되었지만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조장한 그 실체를 파악한 후에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그치게 했고 그 이후로는 방언이 사라지게 되었다. 고린도전서의 기록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난 후의 기록이 아니라 이제 막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록된 문건이다. (중략)고린도 교회의 방언 문제가 해결된 것은 고린도전서가 아니라 고린도후서 11장까지 가서 그 실체가 밝혀짐으로 그치게 되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오순절 방언의 방언과 같은 외국어가 아니라 거짓 사도와 궤휼의 역군들이 초래한 거짓 방언이어서 그치게 되었다면, 고린도 교회의 방언과 꼭 같은 현대교회의 방언도 그치게 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였다. 위의 인용문은 길지만 노우호 목사의 방언에 대한 인식과 주장의 기본이 되는 틀(Frame)이므로 자세히 인용하였다. 노우호 목사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진짜 성경적 방언은 오순절 날, 고넬료의 집, 그리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12명의 제자들에게 안수한 이 세 번의 경우에 나타난 외국어 형태의 방언만이 참된 방언이었고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이해 불가한 형태의 방언은 참된 방언이 아니었고 애초에 가짜 방언이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형태의 방언을 처음 들어보았기에 본래 외국어 형태의 진짜 방언처럼 통역을 해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방검, 108)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 목사의 주장으로는"필자의 짐작으로는 고린도에서의 방언이 성령께서 주신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고의적으로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비밀로 기도하는 척 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전혀 의미도 없는 헛소리였거나 사탄이 가지고 들어온 짝퉁 방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방검(143)따라서 통역을 통해 사람들에게 해석되어 질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가짜 방언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노우호 목사는 방검(15)에서 "그러나 본래 방언들(glwvssai")은 기도(祈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表迹)이었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방검(18)에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나타난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강림과 함께 나타난 표적(表迹, shmei'on)이었다." 라고 하였다. 이 말들을 요약해보면 노 목사의 주장은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은 진짜 방언으로써 이때의 방언은 외국어 형태로 나타났으며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부인(否認)할 수 없도록 만들어 그들이 사도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믿음을 가지도록 만든 표적(Sign)이다' 라고 정리할 수가 있다. 그런데 노 목사가 인용하신 바 "방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表迹)이었다"는 성경원문을 살펴보면 본래 노우호 목사가 생각하시는 그런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4:22에 나오는 말씀으로"(고전 14:22, 개정)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가 전문(全文)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본문의 맨 앞에는 그러므로 (w{ste)라는 접속부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앞의 내용이 뒤의 내용의 이유나 원인, 근거가 될 때 쓰는 접속부사이다. 성경원어해석의 세계적인 툴(Tool)로 인정받는 BibleWorks의 정의(定義)에 따르면 "introducing an independent clause for this reason"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과 연결되어있는 그 앞 절인 고전 14:21을 보아야만 한다. 고전 14:21에는 이렇게 되어있다."(고전 14:21, 개정)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여기에 보니까 율법이라고 하여 이 구절은 구약을 인용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약에서 인용된 구절을 찾아 어떠한 상태에서 무슨 뜻으로 이 구절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해석의 기본에 따르면 Text는 반드시 Context속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메시지나 콘텐츠"는 "상황과 맥락" 가운데 설명되어져야 본래의 그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고 바르게 이해되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된 구약의 관련구절을 찾아보니 이사야 28:7-13이 그 해당 구절이었다. 지면 관계상 이 부분의 핵심부분인 이사야 28:10-11만 인용하여보면"(사 28:10-11, 개정) [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11]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그러면 이 구절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사실 이 구절은 난해구절로써 많은 학자들이 서로 다른 이견(異見)을 가지고 해석하는 구절이다. 그래서 사실 개정성경으로 이사야 28:10을 읽어보아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번역으로 읽어보겠다."저자가 하는 소리를 좀 들어 보세. 사울라사우, 사울라사우! 카울라카우, 카울라카우!즈에르삼, 즈에르삼!" (공동번역)"그는 우리에게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것을 가르치고 또 가르쳐 계속 같은 말을 하나하나 되풀이하고 있다." (현대인의 성경) "도대체 차블라차브 차블라차브, 카블라카브 카블라카브, 여기서도 조금 외우고 저기서도 조금 외우는 그 소리가 무슨 뜻이냐?" (현대어 성경)이처럼 다양한 번역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 만큼 학자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일단 그 해석의 두 가지 큰 줄기를 살펴보자. 과거에는 학자들이 이사야 28장 10절에 나오는 단어들이 특별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들 학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단어, Saw는 종종 ‘명령(miswa)’이나 ‘교훈(sawa)’의 축약된 말 또는 ‘측량줄(qaw)’이라는 단어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리고 이런 추측을 통해 해석한 전체 구절의 의미는 예언자의 계속적인 도덕적 교훈을 비웃는 술 취한 불량배들을 묘사하는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학자들은 이 구절이 예언자들의 빠른 말이나 발걸음을 흉내 낸 의미 없는 의성어(擬聲語)는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스왈트(Oswalt)는 이 구절에 대한 학자들의 여러 의견들을 종합하여 소개하였는데 첫째는, 남을 조롱하기 위한 의미 없는 단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자체 의미는 없지만 남을 놀리는 말인 블라, 블라, 블라 (Blah Blah Blah)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상대의 말을 의미 없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흉내 내며 얕보고 조롱하는 표현이다. 둘째는, 어린아이들의 걸음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의미 없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며 셋째는, 술 취해서 떠들 때의 수다를 묘사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넷째는, 히브리어의 언어유희. 즉 발음은 비슷하나 뜻이 다른 단어들을 엮어 풍자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섯째는, 알파벳을 가르치는데 사용한 주해의 부분으로 보기도 하고, 여섯째는, 아카드 어(바빌론의 언어)로 보며 그 의미는 "가라, 그를 보내라, 기다려라 그를 기다리게 해라, 종아 들으라" 라고도 읽혀질 수 있다고 본다. 이처럼 이 구절에 나타난 의성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학문적인 가정(假定)들이 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 구절이 주는 의미만큼은 학자들 모두가 분명한 일치를 보고 있는데 그것은 술 취한 불량배들이 예언자의 계속적인 교훈을 무시하고 비웃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내용의 결론은 한가지인데 이것을 프랑크 보이드(Frank M. Boyd)가 이렇게 정리 요약하였다. '하나님는 이스라엘의 술 취한 불량배들이 예언자의 말을 무시하고 단음절의 말로 예언자의 말을 흉내 내며 조롱했던 것을 심판하시기 위해 장차 단음절의 언어를 사용하는 무자비한 아수르 침략자들을 보내시어 그들의 눈앞에서 직접 말하게 하실 것을 예언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가야할 것이 있다. 어떤 분들은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 28:11에 나오는 심판자들의 언어가 아수르 어(語), 즉, 외국어이므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도 외국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한다는 분들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을 쓴 이창모 목사가 정리를 잘 해놓았다. 이하 이 책을 "방불편"이라는 약어로 쓰겠다. 방불편에 모아놓은 자료를 보면 (방불편 323) 옥한흠 목사님의 아들 옥성호 집사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고전 14:21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서는 분명한 외국어이다. 따라서 방언의 본질을 정리하기 위해 근거로 사용한 이사야서의 말씀이 외국어인 이상 바울이 생각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다." 다시 한 번 방불편(323)을 인용해보면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라는 책을 쓴 정이철 목사도 옥성호 집사와 같은 의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다. 물론 이사야서 28:11절에 나오는 것처럼 아수르 말은 분명한 외국어이다. 하지만 이창모 목사의 방불편(323)의 설명처럼 "바울이 이사야서 28:11절을 인용해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외국어임을 설명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바울의 관심이었을까? 호크마 주석 (The Chokmah Commentary)을 통해 고전 14:21에 대한 주석을 살펴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면 여기 인용된 사 28:11, 12의 예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이사야 시대에 유대인들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려고 하시는 말씀이 장차 외국인들(아수르 사람들)이 유대를 침략하여 정복하고 지배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여기 이른바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것이라고 한 말씀의 의미이다. 여기 "다른 방언하는 자"란 말은 아수르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다른 방언하는 자가 유대인에게 온 것은 그들을 벌하시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일반이 깨닫지 못하는 말로 회중에게 말하면 그것은 그 회중에게 대한 일종의 벌이다. 그것은 유익을 주는 일이 아니다." 이어 호크마는 고전 14:22에 대한 주석에서는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이 말씀 뜻은, 남들이 깨닫지도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듣는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23절).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마침내 다른 방언하는 자(아수르 민족)의 지배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았음과 같은 일이다(21절).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 곧, 방언하는 결과는, 그 듣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고쳐 주지 못하고 그냥 믿지 않는 자들로 남아 있도록 하는 것 뿐이란 뜻이다. 이것은 방언의 결과가 어떠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 이것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예언을 하면 그 듣는 자들이 회개하고 믿는 데로 나아가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주석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고전 14:21-22에서 바울이 강조한 방점(傍點)은 방언의 외국어 여부가 아닌 방언이 지닌 알아듣지 못하는 속성에 관한 것이다. 즉,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이해불가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고전 14:22을 포함하여 고전 14장 전체가 강조하고 있는 요점이다. 바울이 이사야서를 인용한 의도에 대해 이창모 목사의 책 방불편이 적절한 설명을 하고 있기에 인용하여본다. 방불편(328-329) "바울은 이사야서 28장 11절을 인용하면서 무엇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 아수르 방언인가? 아니다. 바울의 관심은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이 선지자의 예언으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되었다는데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수르를 보내어 심판하실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데 있다. 고린도전서 14장 21절의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는 이스라엘이 아수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아수르 방언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지라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선지자의 예언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중략)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듣게 될 아수르 방언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듣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의 표적이다." 방불편(332)의 다른 구절을 좀 더 인용해보면 "하나님은 '전(前)에 그들에게' 선지자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예언하게 하셨으나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다.(사 28:12)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는 자들(아수르)을 도구로 삼아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11, 13절) 하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아수르 방언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잡소리 정도로 여겼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이들이 정말로 알아들을 수 없는 아수르 방언을 심판의 표적으로 삼으실 것이다. 이제 곧 이스라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아수르가 쳐들어옴으로 아수르 방언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수르 방언소리가 이들에게 심판의 표적이 될 것이다."10) 이창모 목사의 이러한 주석은 이사야 28장에 대한 정확한 핵심을 짚었다고 본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앞서 많은 학자들이 이사야 28:10에 대한 주석에서 그 출처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었지만 결국 결론은 동일했다고 말하였다. 즉, 이사야 28:10의 본래 출처가 1. 선지자를 조롱하기 위한 의미 없는 말이든지 2. 어린아이의 걸음마를 가르치기 위한 의미없는 말이든지 (예, 읏쌰 읏샤) 3. 술 취해서 떠들 때의 수다를 묘사한 것이든지 4. 히브리어의 언어유희이든지 혹은 그 밖에 어느 것이었든지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선지자의 참된 예언을 듣지 않는 술 취한 모리배들이 선지자의 교훈을 무시하고 비웃는 표현"이라는 것이며 그래서 장차 올 심판 날에는 이사야 28:11절의 표현처럼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 모리배들이 흉내 내어 약 올리던 것과 같은 단음절의 소리를 그들의 얼굴 앞에 들려주는 방식으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결국 바울이 이사야 28:11절을 인용하여 고전 14:22에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설명한 것은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아수르 언어가 심판의 표적(Sign)이 되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방언도 (들어서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하므로) 결국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 14장에서 방언과 대비되어 설명되는 예언을 살펴보면 보다 확실히 이해될 수가 있다. 바울은 고전 14:22에서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라고 말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까닭은 예언은 속성상 같은 언어 (그러므로 듣는 자가 알아들을 수 있다)를 통해 상대의 숨겨진 비밀한 것이 드러나게 하므로 듣는 사람은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은사이다. 이처럼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믿음으로 이어지게 하는 은사이므로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언의 경우에는 속성상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이기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방언을 들을 때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방언하는 사람들을 미쳤다라고 말하게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방언의 속성인, "들어도 이해되지 않는 것"과 이에 반(反)하여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예언의 속성에 대한 대비는 고전 14장 전체에 걸쳐 설명되고 있다. 2절 (방언은) 알아 듣는 자가 없고 5절 (방언을 통역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기에)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므로 예언하는 자만 못하다 6-12절 (방언은 이해할 수 없기에)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없기에 통역(13절)을 하라 14-17절 (방언은 이해할 수 없기에) 사용할 때 방언하는 자의 영에게는 좋지만 방언하는 자 자신의 마음이나 듣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움이나 유익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방언은 이해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설명하는 맥락가운데 바울은 이사야28:10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주장이 나올지는 분명해진다. 바울이 주장하는 요점은 "선지자의 가르침을 가지고 블라블라블라 (Blah Blah Blah)하며 약 올리고 놀리다가 마침내 그들이 행한 똑같은 방식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은 사람들이 듣기는 하여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심판의)표적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전 14:28에서 고전 14장의 앞부분에서 행하였던 주장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즉, 고전14:21-22에서 이사야서의 인용을 통해 방언의 이해할 수 없는 속성에 대한 설명을 한 것에 이어서 고전 14:28에서는 (방언은 이해되지 않아 타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함으로) 방언하는 사람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을 자기 혼자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만 사용하여야 한다고 방언사용의 지침까지 내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울의 방언에 대한 논지(論旨)는 분명한다. 그는 "예언과는 달리 듣는 사람들이 이해할수 없는 방언은 통역은사가 동반하지 않는 한 교회나 타인에게 유익을 줄 수가 없으므로 개인적으로만 사용할 것"을 고전 14장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거듭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다시금 노우호 목사가 고전 14:21-22을 인용하여 방검(15)에서 "그러나 본래방언들(glwvssai")은 기도(祈禱)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表迹)이었다." 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보겠다. 앞서 논의한 내용들을 전제하고 이 말을 읽어보면 정말 엉뚱한 말이 아닐 수가 없다. 왜냐하면 노우호 목사의 의도는 "방언은 외국어들로써 (오순절에 그랬던 것처럼)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적(異蹟)임을 부인할 수 없고 믿음으로 이어지게 하는 표적"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우호 목사는 방검(126)에서 고전 14:21-22을 새로이 번역하여 기록하였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21절 율법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른 외국어들을 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을 해도 저희가 듣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2절 따라서 외국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表迹)이지만 예언(豫言)은 믿는 자들을 위하는 것이라 21-22절을 새로이 번역해놓은 것은 텍스트 자체만으로 보면 그럴 듯하게 보인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엉뚱한 주장이 되고야 만다. 왜냐하면 노우호 목사는 이 구절들이 오순절 날 외국어방언이 일어나 믿지 않는 자들이 믿게 되는 표적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위한 기초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우호 목사가 이해하는 참된 성경적 방언은 오순절 날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모였을 때 사도들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히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부인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도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만든 (방검 18)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Sign)"이라는 것이다. (방검 15) 그러나 거듭하여 말하지만 바울이 쓴 고전 14:22의 본래 의도는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고전 14:22의 메시지는, 방언은 이해할 수 없어 듣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어주지 못하므로 결국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심판의) 표적이 되고야 만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노우호 목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노우호 목사가 고전 14장 21-22에 대해서 범한 성경주석의 오류는 일단락 하겠다. 여기서 노우호 목사의 주석과 번역에 대한 또 다른 문제점을 살펴보자. 노우호 목사는 방검 (121)에서 "바울은 12장부터 14장까지 방언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용어를 분명하게 가려서 하고 있다. 외국어들을 말하는 경우에는 글로싸이스 (γλώσσαίς, 복수)로 기록하고 고린도교인들이 말하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는 글로쎄 (γλώσση 단수)로 구분하여 쓰고 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만일 노우호 목사가 말한 것처럼 고전 14장 21-22절에서 말하는 방언이 복수형이니 외국어이었다면 왜 23절과 같은 반응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노우호 목사는 방검(126)에서 고전14:23을 아래와 같이 새로이 번역까지 하였다.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모여 다 함께 외국어들로 말하면 일반인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너희를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 노우호 목사는 외국어로 말할 때 통역이 없으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노 목사의 말처럼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말하게 되면 그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만 벌어진다. 그 이유는 만일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배우지않은 외국어로 말하게 하신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미 그 외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언을 하는 사람이 예언을 하면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의 마음에 숨은 비밀들이 드러나고 (고전 14:25) 지식의 은사를 가진 사람의 은사가 사용될 때도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이미 그 말을 들어야할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배우지 않은 외국어 표적을 주실 때는 이미 그 자리에 그 말을 듣고 영광을 돌릴 사람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나 교회사,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에도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는 제노글로씨아(Xenoglossia) 현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때 동일하게 증명된 일이다. 먼저 성경에서 그 예를 살펴보자. 오순절 날 사도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말했을 때 사람들이 사도들이 미쳤다고 말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미 오순절 날 각국에서 모여든 15개국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사는 지역의 언어로 말해지는 그 외국어를 이해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말을 전할 때 성령께서 임하셔서 오순절 날과 동일한 현상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말하는 자들을 보고 미쳤다고 말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거기에도 배우지 않은 외국어가 나타났을 때 이미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12명의 제자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이 내려 그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말했을 때는 어땠을까? 그들도 역시 아무런 혼란이 없이 하나님께 영광만 돌렸다. 그것은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패턴은 교회사 내내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동일한 패턴으로 일어나고 있다. 즉,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는 방언은 미쳤다는 비난을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듣는 사람들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1. 공주(共住)수도원의 창시자였던 파코미우스가 (St. Pachomius, A.D.292-346) 어느 날 서방에서 찾아온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3시간 기도한 후 배우지 않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말할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 방문객들이 파코미우스를 미쳤다고 했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돌렸다. 그 이유는 당시 전 세계에는 몇 만 가지의 언어가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파코미우스가 그 때 필요했던 언어를 아시고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능력을 주셔서 방문객들과 대화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배우지 않은 언어의 능력을 주실 때는 바로 그 자리에 무슨 언어를 사용하는사람이 있는지도 다 알고 주신다. 따라서 노우호 목사가 고전 14:23절을 잘못 번역함으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점인,(통역이 없으므로 인해) '일반인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들을 말하는 사람들을 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 방검(126)라는 상황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2. 스페인 출신의 성인(聖人)이며 수도원 창설자였던 유명한 도미니크 (St. Dominic,1170-1221) 성인은 본래 모국어가 스페인어이었는데 어느 날 기도를 마친 후 독일어로 말할 수가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보고 미쳤다고 했을까? 그와 반대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하였다. 그 독일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이미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3. 프란체스코(Franciscan) 교단의 수도사인 안젤로스 클라레너스 (Angelus Clarenus,1225-1337)도 기도 후 배우지 않은 그리스어와 이탈리아어를 말할 수가 있었다. 이때도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하지 않았다. 이미 거기에는 그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하나님의역사이심을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4. 어거스틴 수녀원의 수녀 원장이었던 성녀(聖) 클레어(St. Clare of Montefalco, 1268–1308)는 이탈리아인이었는데 성령이 충만할 때 프랑스어로 말 할 수 있었다. 이때도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임을 고백하고 영광을 돌렸다. 5. 포르투갈의 가톨릭 사제이며 파두아의 성자(聖者)로 불리는 안토니는 (St. Anthony ofPadua, 1195-1231)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탁발승이었다. 그는 특별히 기적 행함과 설교로 인해유명했는데 그 기적 중의 하나가 외국어 방언이고 그가 설교할 때에 청중들은 종종 마치 초대교회 오순절 날에 일어났던 기적과 같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그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청중들은성 안토니를 미쳤다고 하지 않았다. 이미 그 중에 그 외국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렸기 때문이다. 6. 스페인에서 출생한 루이스 버트랜드 (Louis Bertrand, 1526-1581)는 도미니카 수도회 소속수도사로써 16세기에 남아메리카에서 복음을 전하였던 분이다. 그는 본래 스페인어만 할 수 있었지만 방언의 은사를 받고난 후 선교지의 인디언 언어와 무어인(Moors)의 말로 설교할 수 있었다고 교황 클레멘트 10세(Clement X, 1590-1676)가 확인하였다. 그가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했다고 해서 미쳤다는 비난을 받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외국어 표적이나 은사를주실 때는 이미 그곳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7. 스페인 Xavier 지역에서 태어난 프랜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는 사도 바울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일컬음을 받는 인물이다. 그는 인도와 실론, 말레이 반도를 거쳐 일본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선교지에서 한 번도 배우지 않은 타밀어와 인도네시아 방언으로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교황 그레고리 8세(Gregory XIII, 1502-1585)는 그의 시복식(諡福式)에서 자비에르의 방언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크게 공헌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때도 배우지 않은 외국어가 통역이 없어서 미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을 염려가 전혀 없었다. 8. 프랑스 루이 14세의 치세 말년(1702-04)에 남프랑스의 세벤누 지방에서 일어난 칼뱅파 신교도들인 카미자르(Camisards)는 기도하는 가운데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곤 하였다. 당대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1694-1778)가 카미자르의 방언현상을 관찰한 기록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에 나오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몇몇 카미자르들은 영적 충만함이 지속되는 가운데 유창한 프랑스어로 위그노 성경에 대해 말하였는데 이런 일이 때로는 두 시간 이상 지속되기도 하였으며 그러한 영적 감동이 끝나고 나면 방언을 했던 사람은 다시 그의 모국어로 말하였다고 한다.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는 능력이 나타난 기록들은 이 밖에도 많지만 노우호 목사가 주장하듯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하였다고 해서 "미친 사람들" 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일은 성경의 기록속에서도 일어나지 않았고 교회 역사 속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통해 말하게 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할 때는 통역할 필요도 없이 그 현장에 그 외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언의 은사가 일어날 때,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지구 반대편의 전혀 아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가 아닌, 바로 그 현장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에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상의 주석을 통해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1. 노우호 목사가 주장하는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表迹)이었다." 는 성경의 말씀은 본래 고전 14:22절의 완벽한 인용임에도 불구하고 노 목사가 주장하는 의도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고전 14:22절에서의 방언은 오순절 날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게 하는 표적으로써가 아닌, (이해할 수 없기에) 오히려 사람들이 들어도 그들을 믿음으로 이끌어내지 못하는 심판적인 표적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노우호 목사가 일으킨 고전 14:22에 대한 오해는 오순절에 일어난 방언은 외국어였지만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말한 방언은 알지 못하는 영적 발성(Unintelligible spiritual Utterance)인데도 이 둘을 모두 다 외국어라고 착각하는 데서 기인(起因)한 오류이며 나아가 이사야 28:11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어 복합적으로 일어난 오류이다. 2. 노우호 목사는 고린도전서의 방언(glwvssai", 복수형)을 "외국어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렇게 번역할 경우 성경적 사례나 교회사적 사례를 통하여 살펴볼 때 난센스(nonsense)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가 있었다. 3. 고전 14장에서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5차례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방언은 이해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되풀이하여 설명하고 있다. 또한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며 성령께서 주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적 발성임을 강조하고 있다. 4. 따라서 이상의 주석을 통해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이해할 수 없는(Unintelligible) 발성(Utterance)임이 분명하며 이렇게 이해할 때 12-14장의 각 절과 전체 맥락에 가장 적합하게 부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노우호 목사의 주장한 바 방언들(γλώσσαίς, 복수형)의 해석은 "외국어들"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호소력이 없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2) 고전 14:2 노우호 목사는 방검(113)에서 아예 한 장(章, Chapter)을 "(성경의) 오역(誤譯)으로 인한 오해"라는 제목을 붙여 놓고 성경을 번역할 때 헬라어 원문이 영문 버전과 한글버전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현재의 방언에 대한 오해가 다수(多數)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과연 그러한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고전 14:2에 대한 3가지 번역을 보자. 헬라어 원문이다. oJ ga;r lalw'n glwvssh/ oujk ajnqrwvpoi" lalei' ajlla; qew'/: oujdei;" ga;r ajkouvei, pneuvmati de; lalei' musthvria: 개역성경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노우호 목사가 주장하는 번역이다.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δέ=but)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 여기서 노우호 목사는 주장하기를, 방검(115) "바울이 한 말의 뜻을 살펴보자! 방언을 말하는 자라면 당연히 사람에게 말을 해야 하는 것인데 이들은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아니하고(ούκ) 이와는 달리 (반대로(άλλα) 하나님께 말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즉 방언은 본래 사람에게 말하는 것인데 사람에게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엉뚱하게(반대로)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문장이다. 이를 바르게 인식한 영어번역 에서는 다음과 같은 숙어(熟語)를 사용하여 비교적 바르게 번역했다." (고전 14:2, KJV) For he that speaketh in an unknown tongue speaketh not unto men, but unto God: for no man understandeth him; howbei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 그러면서 주장하기를, 방검(115, 중간) "(바울은) 즉,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하나님께 한다!"고 지적을 하면서 "그렇게 잘못하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고 지적을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howbeit) 그의 영으로 비밀(미스터리)을 말한다."고 하면서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사람들을 못마땅해 하는 말을 한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사실 성경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1. 먼저 위에 언급된 고전 14:2 KJV의 둘째 줄을 보면 그리스 단어 둘이서 함께 우리들에게 매우 친숙한 not A but B 구문을 만들고 있다. 즉, ούκ은 부사로써 의미는 not이다. 그리고 ajlla는 접속사로써 의미는 but이다. 이 둘이 함께 영어구문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not A but B 용법을 만들고 있다. 여기서 but은 2개의 단어를 연결하는 등위상관접속사로 이때 접속사 but은 선행하는 개념과 대립하는 의미나 내용을 이끄는 것으로써 똑같은 문장이 반복되는 것을 생략하게 한다. 예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He is not a teacher but (He is) a student. 여기서도 위와 같이 생략된 주어와 동사를 다 포함시켜 완벽한 문장을 표현해보면 He speaketh not unto men, but (he speaketh) unto God. 이라고 표현 할 수 있다. 이 점은 노우호 목사도 동의한다. 결국 이 구문은 단순히 not A but B 용법으로 oujk ajnqrwvpoi" (not to men), ajlla; qew'/: (but to God) 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영어번역본이 그러한데 한 예로, English Standard Version을 보면 명료하게 "not to men but to God;"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단순하게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한다."라고만 번역하면 된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는 이 구절에 본인이 추측하는 바울의 의도를 첨가하여서 번역을 오히려 이상하게 만들고 있다. 방검(115, 처음) "바울이 한 말의 뜻을 살펴보자! 방언을 말하는 자라면 당연히 사람에게 말을 해야 하는 것인데"와 "사람에게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엉뚱하게(반대로)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문장이다." 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우호 목사 개인의 생각일 뿐 헬라어 원문이나 어떤 영어번역본들에서도 바울이 그런 식의 주장을 하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표현이나 뉘앙스를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고전 14:14-15절은 노우호 목사의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노우호 목사는 방검 (115, 상단)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라면 당연히 사람에게 말을 해야 하는 것인데 (중략) 엉뚱하게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문장이다." 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전 14:14-15에서 '자신은 방언을 통해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라고 말하였을까? (고전 14:14-15, 개정)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이상의 모든 자료들을 살펴 볼 때 노우호 목사가 말한바 방검(115), "(바울은 고전 14:2에서)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하나님께 한다."고 지적을 하면서 "그렇게 잘못하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고 지적을 하였다.'" 라는 말은 노목사의 자의적(恣意的)인 해석이지 결코 성경본문과는 상관없는 해석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노우호 목사가 주장하는 또 다른 오역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노우호 목사는 방검(115, 하단)에서 (고전 14:2을 번역할 때) "우리말 성경의 번역에서 결정적인 실수는 "δέ"라는 접속사를 역접(逆接)의 접속사로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사와 같이 오역을 했다. 그러나 영어 번역에서는 이 단어를 'but'혹은 'howbeit'으로 번역하여 본문의 의미를 비교적 바르게 역접의 접속사로 번역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δέ"를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라는 단어로 번역하였다. 세계적인 원어성경해석도구인 BibleWorks의 분석에 따르면 이 "δέ"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이렇게 사용되고 있다. 1161(인식번호) δέ, de {deh} Meaning: 1) but, moreover, and, etc. Origin: a primary particle (adversative or continuative);; conj Usage: AV - but 1237, and 935, now 166, then 132, also 18, yet 16, yea 13, so 13, moreover 13, nevertheless 11, for 4, even 3, misc 9, not tr 301; 2871 즉, "δέ"라는 단어는 but, and, now, then, also, yet, yea, so, moreover, nevertheless, for, even, etc.이라는 단어들로 번역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빈도수가 매우 낮기는 하지만 (전체 사용예 2871번중 11번 정도로) 이론적으로는 노우호 목사가 주장하듯"nevertheless"라는 단어로 번역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노우호 목사는 고전14:2의 주석을 위한 영어성경본문을 King James Version으로 택하고 거기에 "δέ"와 대응되는 단어인 "howbeit"을 가지고 번역하였다. "howbeit"은 영어 고어(古語)로써 However 나 Nevertheless로 번역될 수 있기에 노우호 목사는 이중에서 Nevertheless를 취하고 그것을 다시 한국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대입하여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주장하는 것을 보면, 방검(116) "필자가 번역한 대로 읽어보면 "알아듣는 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는 뜻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바로 인식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King James Version이 고전 14:2 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을까? 일단 다시 KJV본문을 보자. (고전 14:2, KJV) For he that speaketh in an unknown tongue speaketh not unto men, but unto God: for no man understandeth him; howbei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 영어 본문을 번역해보자. 첫째 줄과 둘째 줄이다. 일단 이 두 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장인데 이 문장은 셋째 줄을 이끌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둘째 줄 맨 뒤를 보면 콜론(:)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영어 문장에서 콜론은 리스트 및 소제목, 인용구, 또는 한마디로 간추릴 때에도 쓰인다. 예를 들어보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영문판 제목이다. Demian: The Story of Emil Sinclair's Youth 데미안: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 시절 이야기 다른 예를 들어보면, Rene Descartes himself also had said: "I think, therefore I am." 르네 데카르트 자신도 말했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이렇듯, 인용구를 들여올 때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영문법을 염두에 두고 KJV 고전 14:2을 번역해보면 첫째 둘째 줄은 하나의 문장으로 끝나면서 콜론 뒤의 셋째 줄 문장을 가지고 오는데 이때 셋째 줄 앞에 for가 붙어있으니 이 셋째 줄은 앞 문장에 필요한 어떤 이유를 간추려서 알게 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번역해보면 이렇다. (고전 14:2, KJV) For he that speaketh in an unknown tongue speaketh not unto men, but unto God: for no man understandeth him; howbei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 1줄, (왜냐하면)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2줄,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한다. 3줄, 그 이유는 어떤 사람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줄 뒤에는 세미콜론(;)이 붙어있는데 세미콜론(;)의 용도는 영문법에서는 한마디로 "관련문장" 혹은 "보조설명" 이다. 그래서 문장을 쓰고 그것을 보조하는 문장을 바로 뒤에 쓸 때에 문장이 완전히 끝났다는 의미인 마침표(.)대신 두 문장은 관련 있는 것이라는 의미인 세미콜론(;)을 주로 쓴다. 즉, 3째줄 뒤에 세미콜론(;)이 붙어있으므로 일단 3째줄 문장은 자체적으로 끝이 났지만 4째 줄이 이 문장을 보조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맞추어 전체를 해석해보면, 1줄,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2줄,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한다. 3줄, 그 이유는 어떤 사람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줄, 그러나 그는 성령 안에서 비밀들을 말하고 있다. 이때 4째 줄에 노우호 목사의 주장대로 Nevertheless를 사용하여 번역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영으로 비밀들을 말하고 있다."라고 번역되어지며 번역이 매우 어색해진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러나" 또는 "하지만"이라는 의미를 가진 "but"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기에 모든 영문번역본은 고전 14:2의 "δέ"를 but 또는 however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New King James Version까지도 아래와 같이 이 단어를 however로 번역하고 있다. (고전 14:2, NKJV) For he who speaks in a tongue does not speak to men but to God, for no one understands him; however, in the spirit he speaks mysteries. 이상의 주석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 것은 노우호 목사가 주장하는 바 '바울이 방언을 말하는 사람을 지적하면서 당연히 사람에게 말해야하는데 왜 하나님께 말하느냐고 하면서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사람들을 못마땅해 하는 말을 한 것이다.'라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노우호 목사가 시도하신 새로운 번역은 완전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사람들을 오도(誤導)하여 잘못된 주장을 따르도록 하는 매우 위험한 시도로써 영문법에 대한 무지와 본문에서 요구하는 바른 단어의 선정에 실패한 것에서 기인(起因)한다고 볼 수 있다. 옥성호씨가 쓴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110) 고린도전서 안에서 ‘방언’이라는 단어를 바울은 두 가지의 의미로 쓰고 있다는 주장이다. 바른 방언을 의미하는 외국어로서의 방언과 틀린 방언을 의미하는 교회 밖의 방언이다. 존맥아더 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을 주해하면서 바울이 이 장에서 사용한 방언은 두 가지였다고 설명한다. 즉, 고린도 지역의 잘못된 방언과 성경의 방언인 외국어 방언을 혼재해서 14장에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구분을 위한 근거로 방언에 해당하는 영어 tongue이 단수로 쓰였는가 복수로 쓰였는가를 근거로 제시한다. 즉, 부정 관사가 있는 a tongue은 헛소리(gibberish)에 해당하는 당시 방언 전체를 통틀어 ‘하나의 말’ 로 표현한 것이고 복수로 쓰인 tongues는 다수의 언어, 즉 외국어에 해당하는 바른 방언이라는 설명이다. 성경이 인정하는 유일한 방언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외국어 방언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맥아더 목사가 단수와 복수의 유무를 근거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 두 가지 방언을 혼재해서 사용했다고 주장한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 고린도의 일반 방언과 성경의 방언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다. 실로 중대한 차이를 가진 이 두 단어를 단순히 단수 복수에 따라 독자가 그 차이를 무리없이 읽고 이해할 것이라고 바울이 기대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14장 2절은 다음과 같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 (For one who speaks in a tongue does not speak to men but to God : for no one understands , but in his spirit he speaks mysteries, NASB) 맥아더 목사는 2절은 대표적인 잘못된 세상 방언으로 본다. 그렇기에 방언에 해당하는 tongue 앞에 관사 a가 왔다고 설명한다. 2. 이 해석대로 할 때 예외의 경우가 생긴다는 점이다. 26절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What is the outcome then, brethren? When you assemble, each one has a psalm, has a teaching, has a revelation, has a tongue, has a interpretation. Let all things be done for edification ) 분명 26절은 바른 방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 방언에 a라는 관사가 있다. 분명히 복수가 나와야 할 자리에 말이다. 바울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 결국 바울이 두 가지의 혼재한 의미로 방언을 사용하면서 그 중요한 차이를 단지 단수와 복수로 구별했다고 보기 힘들다. 만약 바울이 애초에 그럴 의도였다면 그는 분명 두 가지의 의미를 구분하는 ‘형용사’를 사용 했을 것이다. (3) 고전 14:4, 14-17 노우호 목사는 방검(117)에서 말하기를 "(고전 14:4) 이 구절에서 사용된 "δέ" 역시 역접(逆接)의 접속사인데 마치 계속사와 같이 번역을 해서 의미를 흐리게 해 놓았다. 즉 바울은 방언하는 사람과 예언하는 사람을 비교하면서 방언을 부정(否定)하고 예언을 긍정(肯定)하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중략) 이 구절을 원문을 직역(直譯)을 하면 아래와 같이 된다. (고전 14:4) 방언을 하는 자는 자기를 세운다. (δέ) 그러나 예언을 하는 자는 교회를 세운다. 이렇게 번역을 바르게 해 놓으면 누가 보아도 바울이 방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기록 하고 예언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라고 말하였다. 과연 노우호 목사의 말처럼 고전 14:4은 "방언을 부정(否定)하고 예언을 긍정(肯定) 하려는 마음으로 글을 쓴 것"일까? 일단 고전 14:4의 원문과 번역본을 보자. (헬라어) 고전 14:4 oJ lalw'n glwvssh/ eJauto;n oijkodomei': oJ de; profhteuvwn ejkklhsivan oijkodomei'. (KJV) 고전 14:4, He that speaketh in an unknown tongue edifieth himself; but he that prophesieth edifieth the church. (개역) 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이 구절에서 사용된 "δέ"는 노우호 목사의 말처럼 역접(逆接) 접속사이다. 역접접속사는 "그러나"처럼 앞 문장과 대비되거나 상이한 문장을 연결할 때 사용하는데 "but, yet, although, even though, whereas, while" 등이 여기에 해당하고 순접(順接) 접속사는 그 반대로 "그리고"처럼 앞, 뒤의 내용이 비슷한 흐름으로 전개될 때 사용하는 접속사로 "and, so, because, as" 등을 들 수가 있다. 일단 고전 14:4에서 사용되고 있는 "δέ"를 보면 이것은 역접의 등위접속사로써 이것을 번역한 거의 모든 영문번역본들은 여기서의 "δέ"를 "but"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 등위접속사 but은 앞에서 한 말과 반대·대조되는 내용을 소개하며 앞뒤의 독립적으로 대등한 두 문장이 병렬구조로 역접(逆接) 연결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할 것은 이러한 역접의 연결이 노우호 목사의 주장처럼 앞의 문장을 부정하고 뒤의 문장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쓰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He is an adult but he looks like a child. 그는 어른이지만 아이처럼 보인다. 위의 문장에서 보다시피 등위접속사 but은 앞 문장과 뒤 문장을 대비하거나 앞 문장과는 다른 상이한 문장으로 뒤 문장을 이어갈 때 사용하는 역접 접속사일 뿐 노우호 목사의 주장처럼 앞 문장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뒤 문장을 옹호하는 접속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우호 목사의 주장처럼 but이 앞 문장을 부정하고 뒤에 오는 문장을 긍정한다면 아래의 예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I like singing a song, but I don't like playing the violin. '나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지만 바이올린 연주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 앞 문장을 긍정하고 오히려 뒤 문장을 부정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영어에서 부정문을 만드는 것은 여러 가지 부정어들 즉, not, no, never, none, nothing 등이 사용되어야 만들어지는 것이지 역접 접속사인 but이 붙는다고 부정문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는 "δέ"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마다 단순히 역접의 의미를 갖는 이 접속사가 마치 어떤 부정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여러 곳에서 범하고 있다. 즉, 방검(115)에서도 "δέ"를 설명하면서 주장하기를 "우리말 성경의 번역에서 결정적인 실수는 "δέ"라는 접속사를 역접(逆接)의 접속사로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사와 같이 오역을 했다. (중략) "δέ"라는 접속사를 역접(逆接)의 접속사로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사와 같이 인식을 한 경우는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중략) (방검, 117) (고전 14:4) 이 구절에서 사용된 "δέ"역시 역접(逆接)의 접속사인데 마치 계속사와 같이 번역을 해서 의미를 흐리게 해 놓았다. 즉 바울은 방언하는 사람과 예언하는 사람을 비교하면서 방언을 부정(否定)하고 예언을 긍정(肯定)하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역접 접속사인 "δέ"가 그 앞의 문장이나 단어를 부정적으로 보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앞뒤의 문장이나 혹은 단어를 역접으로 대조·대비시키는 접속사일 뿐이다. 사실 이"δέ"는 문맥에 따라 각각 순접 혹은 역접, 그런가하면 전환의 접속사로도 번역될 수가 있는 단어이다. 세계적인 원어성경해석도구인 BibleWorks의 분석에 따르면 이 "δέ"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역접접속사 but으로는 1237회 그리고 순접접속사 and로는 935회 번역되고 있다. 그리고 고전14:4에서는 역접접속사로 번역되어져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δέ"가 역접 접속사로 번역된다고 해서 그 앞의 문장이나 단어를 부정적으로 보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It was short but strong. '그것은 짧았지만 강했다' 이처럼 두 단어 short와 strong을 대조적으로 연결할 때 사용되는 역접접속사 but이 앞 단어인short를 부정하고 뒤 단어인 strong을 긍정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주장일 뿐이다. 이 문장은 두 단어 short와 strong을 둘 다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등위접속사로써 역접의 뜻을 갖는 but은 두 단어를 대조적으로 대비하는 역할을 하는 접속사 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노우호 목사는 방검(117)에서 말하기를, "(고전 14:4) 방언을 하는 자는 자기를 세운다. (δέ)그러나 예언을 하는 자는 교회를 세운다. 이렇게 번역을 바르게 해 놓으면 누가 보아도 바울이 방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예언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방언과 예언의 속성을 대비하여 '(영으로 기도해서남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방언기도는 그 속성상) 기도하는 사람 자신을 세우고' 이와 대비하여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사람들의 숨겨진 비밀을 회중 앞에 드러내는 예언은 그 속성상) 교회구성원들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하는 것일 뿐 이 구절이 방언을 부정하고 예언은 긍정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들어, 한국어 성경에서는 "δέ"가 역접임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고 잘못 번역하는 오류를 범하여 바울이 방언을 부정(否定)하려는 의도를 바로 나타내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는 노우호 목사의 말은 영어의 역접 접속사가 갖는 기본적 용법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발생한 오해임을 알 수가 있다. 노우호 목사가 주장하는 오역과 오해의 또 다른 구절을 살펴보자. 고린도전서 14:14이다. 먼저 성경본문을 번역본 별로 살펴보자. (헬라어) 고전 14:14 eja;n ((ga;r)) proseuvcwmai glwvssh/, to; pneu'mav mou proseuvcetai, oJ de; nou'" mou a[karpov" ejstin. (KJV) 고전 14:14, For if I pray in an unknown tongue, my spirit prayeth, but my understanding is unfruitful. (개역) 고전 14:14, (고전 14:14, 개역)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노우호 목사는 이 구절에 대해 방검(118),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이해하기를, "바울은 자기 마음에 열매는 없지만 그의 영으로 방 언기도를 해 왔던 것"으로 오해를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을 바르게 번역해 놓고 보면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노우호 목사 번역본) 고전 14:14, 내가 만일(ἐὰν=if)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하지만(δὲ=but) 나의 마음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다. 이 문장은 가정법(假定法) 현재로 되어 있는 문장이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 고린도 사람들처럼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자기의 영이 기도한다고 하겠지만 자신의 마음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정법 문장에서 부정문이라는 것을 알고 번역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노우호 목사의 주장처럼 고전 14:14은 가정법이었기에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으며 (방검, 118)' 나아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어이없어하면서' 가정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 먼저 영문법을 살펴보면 이 구절은 가정법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종 If로 시작하면 무조건 가정법이라고 생각하는 오해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If에는 두 가지 쓰임이 있다. 1. 단순조건절 If이다. 이것은 어떤 조건이나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언급하고자 할 때 if절을 사용하는데 이때의 if는 단순조건절의 if로써 이것은 if 가정법과는 다르다. 단순조건절 if의 예를 들어보면, If you pour oil on water, it floats. 물에 기름을 부으면 기름이 물에 뜬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If you get here before eight, we can catch the early train. 네가 8시 전에 여기에 도착하면 우리는 이른 기차를 탈 수 있다. 2. 가정법 If이다. 이것은 사실과 반대되는 것을 가정하거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미래의 일 등을 가정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가정이 설정되는 상황을 살펴보자. 1. 현재 사실이나 상황과 반대되는 내용이나 불가능한 것 2. 미래에 대한 강한 의심이나 의혹 3.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미래에 대한 가정 4. 과거 사실이나 상황과 반대되는 내용이나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가정 5. 과거 사실의 반대되는 가정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 이처럼 가정법은 문장에 제시된 내용이 실제 사실의 내용과 반대되는 내용이거나 이야기하는 시점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사실을 나타낸다는 점을 생각하고 문장 전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가정법 if의 예를 들어보면, If I were rich, I could buy all I wanted. 내가 부자라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살 수 있을 텐데. 이 예는 가정법으로 사실의 반대이거나 실현 가능성이 낮은 사실을 가정하는 것이기에 이 예에서 화자(話者)는 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짐작하여 알 수가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If it snowed during the summer, it would be fantastic. 여름에 눈이 온다면 정말 환상적일 거야. 이 예도 사실과 반대되는 것이나 실현가능성이 낮은 사실을 가정하는 가정법으로 본문에 나와있는 '만일 여름에 눈이 온다면' 대신에 '만일 겨울에 눈이 온다면'이라고 if 조건 절을 가정할 경우 이것은 실제 사실에 반대되거나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일이 아니기에 이러한 가정법은 성립할 수가 없게 된다. 이처럼 둘 다 If를 사용하지만 단순조건절 If와 가정법 If는 다르며 문장의 형태도 다르다. 즉, 단순조건절 if의 문장형태는 If +S(주어) + V(동사), S + V 로서 조건절인 If절은 조동사가 쓰이지 않으나 주절인 뒤 문장에는 Will, shall, may, can, must 이 간혹 쓰일 수도 있고 혹은 주어의 성·수·격에 따른 변화형이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if 가정법인 경우의 문장형태는 If +S(주어) + V(동사), S + 조동사 +동사원형 으로써주절에는 반드시 조동사가 나온다. 즉 가정법 주절에는 반드시 조동사가 사용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가정법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영문법을 전제하고 고전 14:14을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노우호 목사가 사용하는 King James Version은 고어(古語)라 New King James Version로 보도록 하자. 다른 번역본들도 시제는 모두 동일하다. (고전 14:14, NKJV) For if I pray in a tongue, my spirit prays, but my understanding is unfruitful. 보듯이 이 문장의 주절에는 조동사 대신에 3인칭 단수 현재형인 "prays"가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가정법이 아니고 if 단순조건절로 보아야 한다. 이 구절에서 단순조건절과 가정법의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영문법에서는 실현이 가능하면 단순 조건 절을, 사실과 반대이거나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면 가정법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서 분석해보았듯이 고린도전서 14:14은 가정법이 아니고 if 단순조건절이므로 실현이 가능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언급하고자 if 조건 절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전 14:14을 쓸 때의 의도는 노우호 목사가 방검(119)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어이없어 하면서 "자기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면"이라고 가정법(假定法)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즉, 노우호 목사의 주장처럼 이 문장이 가정법이었다면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절대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부정적으로 고전 14:14을 쓴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살펴본 바 이 구절은 if 단순조건절이므로 바울이 고전 14:14을 쓸 때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당연히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부분을 살펴보자. 노우호 목사는 방검(119)에서 말하기를 "(고전 14:14) 이 구절도 헬라어 원문을 보면 번역에 다소 문제가 있다. 이 구절을 잘 보면 바울이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기도해 왔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할 것이라고 미래적인 말(I will)을 하고 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고전 14:14에는 “proseuvcetai”를 쓰고 있는데 이것을 세계적 원어해석 프로그램인 BibleWorks의 단어 정밀분석을 통하여 살펴보면 "to pray, verb indicative present middle 3rd person singular"로 나와 있다. 즉, 기도하다는 동사로써 현재, 중간태, 3인칭, 단수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My spirit) prays"가 된다. 그러므로 이것이 미래형인 "I will pray" 라는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만일 노우호 목사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면 고전 14:15에서 사용된 것처럼 proseuvxomai가 사용되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to pray verb indicative future middle 1st person singular"로써 기도하다는 동사로 미래, 중간태, 1인칭, 단수로 "I will pray"라고 번역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부분을 살펴보자. 노우호 목사는 방검 (119, 중간)에서 "이어지는 구절을 최대한 바르게 번역해 보자! (고전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yalw') 사람들은 이 구절까지도 오해를 하고 있다. 바울은 방언으로도 기도했고 또 마음으로도 기도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이 말의 본뜻은 영으로 혹은 방언으로 기도를 해 놓고 또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하고 영으로 찬미를 한 다음에 또 마음으로 찬미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즉 이중으로 하여 번거롭게 될 것을 지적하고 있는 말씀이다. (중략) 바울이 기도(祈禱)와 찬미(讚美)를 할 때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굳이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찬미를 하게 될 경우에는 그 방언을 통역하여 알아듣게 해야 할 것임을 강조한 말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고전 14:16절을 인용하여 "뒤를 이어 16절도 읽어 보자! (노우호 목사 번역본) 고전 14:16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영으로 축복을 해도 일반인들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데 너의 감사에 어떻게 '아 - 멘!' 하겠나? 여기까지 만이라도 연결해서 읽어 보았다면 바울이 한 말을 그렇게 오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통전적으로 읽어서 기록된 원목적(原目的)을 바르게 이해(理解)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 부분을 주석할 때는 노우호 목사가 한글 번역본들을 잘 신뢰하지 않고 임의로 단어들을 수정및 가감(加減)하기에 차라리 영문본을 통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영문본은 English Standard Version으로 2011년에 완성되었으며 특별히 "어구(語句)에 충실한" 번역 철학을 가진("essentially literal" translation philosophy) 영문 번역본이다. (고전 14:13-17, ESV) [13] Therefore, one who speaks in a tongue should pray for the power to interpret. [14] For if I pray in a tongue, my spirit prays but my mind is unfruitful. [15] What am I to do? I will pray with my spirit, but I will pray with my mind also; I will sing praise with my spirit, but I will sing with my mind also. [16] Otherwise, if you give thanks with your spirit, how can anyone in the position of an outsider say "Amen" to your thanksgiving when he does not know what you are saying? [17] For you may be giving thanks well enough, but the other person is not being built up. 이 번역본을 보면 13절에 "방언을 하는 사람은 통역을 하기위해 기도하라"라고 말하였다. 이어지는 14절에 보면, if 조건절을 시작하면서 앞에 For를 붙여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14절은 분리해서 해석해도 된다. 그리고 15절은 14절에서 제기된 문제인 "방언을 할 때 영으로 기도하지만 마음으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설명해주고 있는 구절이다. 그러므로 15절은 14절과 함께 묶어서 생각해야만 한다. 그 다음 16절에는 문두에 "Otherwise"를 써서 13절에서 주장된 "방언을 하는 사람은 통역을 하기위해 기도하라"를 하지 않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이어지는 17절에는 16절에서 일어난 '방언으로 축복하면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해 감사하지 못하는' 결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쉽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고전 14장의 13절은 내용상 16절과 17절로 이어지고 그사이에 있는 14절과 15절은 if 단순조건절을 통하여 삽입되어 보충설명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로 그러한지 한글 성경으로 13절에서 16절로 직접 이어보자. (고전 14:13, 16-17, 개정)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이처럼 고전 14:14-15절을 건너뛰어도 문장이 부드럽게 잘 이어지고 있으며 뜻이 분명하게 이해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에 반해 노우호 목사는 16절의 문두(文頭)에 있는 "그렇지 아니하면"을 가지고 앞에 있는 15절의 말을 직접 받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방검(120)에서 말하기를, "(고전 14:15절은 바울이) 자기가 방언이나 영으로 무슨 기도나 찬미를 할 때에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기도나 찬미를 해서는 알아듣고 아멘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결국은 이중으로 번거롭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는 말을 하고 있는 대목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방검(120) "(노우호 목사 번역본) 고전 14:15 그러면 무엇인가? 내가 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고 내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며 내가 영으로 찬양해야 할 것이고 내가 마음으로 찬양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진정한 의도는 기꺼이 이렇게 하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방언을 했다면 반드시 통역을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마음으로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뒤를 이어 16절도 읽어 보자! (노우호 목사 번역본) 고전 14:16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영으로 축복을 해도 일반인들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데 너의 감사에 어떻게 '아 - 멘!' 하겠나? 여기까지 만이라도 연결해서 읽어 보았다면 바울이 한 말을 그렇게 오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통전적으로 읽어서 기록된 원목적(原目的)을 바르게 이해(理解)하도록 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고전 14:16절은 13절의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에 걸리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14절은 if 단순 조건절로써 '방언 기도는 영의 기도라 마음(이성)에는 이해가 안되므로 (마음에는) 열매가 없다.'를 말하고 있고 15절은 그 해결책으로 '영의 기도인 방언과 마음의 기도를 동시에 하며' 또한 '방언으로 영의 찬송을 하며 동시에 마음으로도 찬송을 하리라' 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고전 14:16절은 '방언통역이 안되면 방언으로 축복하더라도 감사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13절의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에 직접적으로 걸리고 있다. 만일 노우호 목사의 주장처럼 고전 14:16절을 15절에 걸어보면, 15절에서 말한 '영의 기도인 방언과 마음의 기도를 동시에 하며' 또한 '방언으로 영의 찬송을 하며 동시에 마음으로도 찬송을 하리라' 라는 주장을 16절이 받으면서 '그렇지 아니하면'이라고 시작하게 되는데 실상 16절의 내용은 방언통역을 하지 않을 때 벌어지는 문제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문장이 매우 어색해진다. 이러한 어색함에 대해 노우호 목사는 15절이 방언의 통역을 말하고 있으며 그 번거로움에 대해 바울이 지적하고 있다고 하나 15절의 내용에는 전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사실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 고전 14:15절에서 바울은 이미 고전 14장 2절, 6-8절, 11절 등,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였듯이 (방언은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영적 발성이므로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영으로 기도함과 동시에 (일반적인 기도처럼) 마음(이성)으로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영문·한글 번역본들이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고전 14:15, 현대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양쪽을 다하자.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도 기도하자. 방언으로 찬미하고 보통 말로도 찬미하자. (고전 14:15, 공동)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나는 심령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기도하자. 나는 심령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이처럼 고전 14:15절은 영의 기도인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마음의 열매를 위해서 동시에 마음(이성)으로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말하기를) 영으로 기도하고 그것을 통역해야만 하고 영으로 찬양하고 그것을 통역해야만 하기에 번거로워 괴롭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가설일 뿐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 나가면서 박영돈교수의 주장 우리 교회에 치유의 역사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목사들은 원래부터 기적은 없었다고 보는 반면, 보수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목사들은 대개 성경 시대에는 기적이 일어났으나 지금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양측 모두 초자연적인 세계를 부인하는 세속주의 세계관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하는 셈이다. 이에 대응하여 현대의 은사 운동이나 신사도 운동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은사와 기적이 지금도 그대로 재현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되는 양극단의 입장 사이에서 교인들은 갈피를 잡기가 어려운 지경이다.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는 교회와 교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한편에는 신비주의나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훼방하는 자들이라고 맞대응하며 서로를 향해 적의를 표출하고 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초자연적인 기사로 인해 양분되는 심각한 국면을 맞이하였다. 어떻게 이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혀 갈수 있을 지가 우리 앞에 놓인 중대한 과제다. 성경을 통해 화합해야 하는데 서로가 성경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니 그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그들의 성경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고 있는 신학적인 편견을 인정하고 내려놓지 않는 한 그 일은 불가능하다. 보수 교회는 초자연적인 은사와 기적은 초대교회에만 한정되었다는 신학적인 전통에 갇혀 오랫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고정된 신학의 틀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해 왔다. 카이퍼(Kuyper)나 워필드(Warfield) 같은 대 신학자들의 권위가 실린 이런 견해는 마치 정통의 상징인 양 보수 교회를 지배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자의적이고 성경의 어디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 초자연적인 은사와 기적이 사라졌다는 말씀이나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가? 초자연적인 은사가 계시나 사도적 권위와 연관된 것이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견해는 성경이 참으로 그렇게 말하는지를 냉철하게 살펴보기보다 오히려 워필드 같은 신학자의 견해를 무분별하게 답습한 것이다. 신학적 편견이 우리를 세뇌하는 위력은 실로 엄청나다. 여기에 한번 사로잡히면 자신의 견해가 틀림없이 성경적이라는 확신 속에 성경의 분명한 증거를 보지 못한다. 성령의 분명한 뜻이라는 확고한 판단으로 그분의 선하신 뜻을 거스른다. 그동안 보수 교회는 신학적인 편견과 교만으로 성령의 역사하심과 그 능력의 나타남을 심대하게 방해해 온 것이 아닌지를 깊이 자성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교회에 부여하신 여러 가지 은사와 능력을 우리가 부정하여 가르치지 않고 사장 시켜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런 은사와 능력의 역동적인 역사가 없이 어떻게 교회가 죄와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 할 수 있겠는가? 현대 은사 운동이 초자연적인 은사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혼란을 야기한다면, 보수교회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깡그리 무시해 버림으로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교회의 역사 속에 일어나 극단적인 운동은 항상 기존 교회가 소홀했던 측면을 일깨워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리 교회는 은사 운동에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고 더욱 문을 굳게 닫아버리기보다 오히려 은사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 초자연적인 은사에 집착한 나머지 열매를 무시하는 경향은 배격해야 하지만 열매만을 강조한 채 은사를 평가 절하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열매뿐 아니라 은사도 필요하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열매와 은사가 모두 풍성한 교회다. 현대 교회에 은사에 대한 혼란이 극심하게 된 데는 하나님이 그분의 교회를 위해 부여하신 선물들을 사이비와 광신적인 집단에게 맡겨 버린 채 건전한 은사 사역을 등한시해 온 기존 교회에도 일정부분 책임이있다. 잘못된 은사 운동에 대응하는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은 초자연적인 은사를 모두 부정함으로써 은사 추구를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성장을 위해 건전하게 은사를 활용할 수 있는 성경적인 지침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치유 집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비판과 정죄로 일관하기보다 성경적인 치유 신학을 정립하고 바람직한 치유 사역의 모델을 제시해 주는 것이 더 긍정적으로 문제를 대처하는 방안이다. <부록> 김동수교수의 [방언,성령의 은사]에서 발췌 바울이 말한 방언은 방언 기도가 아니라고? 이들의 주장의 요체는 바울이 소개한 방언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금 앞에서 말한 대로 바울은 분명히 방언이 기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다”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14:15).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근거로 바울이 말한 방언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이창모 목사는˹[방언, 그 불편한 진실]˼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해서 필자(김동수교수)의 반박과 적절한 답을 추가하면 다음과 같다. 1) 주장: 바울은 ‘글로사’(방언, 혀)의 복수형은 방언의 은사를, 단수형은 가짜 은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양자를 구별한다. 반박: 바울이 단수형과 복수형을 사용해서 참 방언과 거짓 방언을 구별해서 말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어떤 것의 진위를 설명할 때 저자가 단복수를 사용해서 한다는 예의 동서고금의 어떤 문서를 통해서도 본 바 없다. 또 본문 자체에서도 이런 증거는 전혀 없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방언들”은 진짜 방언을, “방언”은 가짜 방언을 의미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는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바울은 독자들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게, 마치 암호화 하듯이 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가? 2) 주장: 고전 14:2, 4에서 방언이 하나님께 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다. 반박: 이러한 주장은 바울이 전혀 말하지도 않은 방언에 대한 정의(외국어를 말하는 능력)에서 출발해서 이런 엉뚱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반대하는 고린도 교회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기록 당시에 인용부호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해서 저자는 말할 수 있었고 또 저자들은 그렇게 했다. 서양 언어의 주요 번역과 한글 번역에서 이 구절을 인용부로 처리한 번역본은 하나도 없다. 3) 주장: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하는 방언 (고전 12:3)과 인간적으로 말하는 방언(14:2)을 구별하고 있고 후자는 거짓 방언이라고 생각했다. 반박: 또 고전 14:2에서 “영으로”는 그 의미가 “성령으로”도 될 수 있고 혹은 “사람[신자]의 영으로”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성령으로” 혹은 “하나님의 영으로”와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영으로”와 대척 개념으로 삼고 있는 것은 개역개정판에서 “마음으로”로 번역한 “이성으로”이다(고전 14:15-16). 여기서 방언은 사람이 이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에 의해 자신의 영으로 혹은 성령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성령에 의한 진짜 방언과 인간의 영에 의한 가짜 방언을 말했다는 것은 본문에 근거하지 않은 말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방언의 진위 문제가 아니라 방언의 바른 사용법을 말하고 있다. 올바르지 않은 사용법 중 하나는 통역 없이 공적으로 방언을 사용하는 것이고, 올바른 사용법은 공적으로 방언을 할 때는 통역을 동반해서 사용하든지(고전 14:13), 아니면 사적으로만 하는 것이다(고전 14:28). 4) 주장: 고린도전서 14:14-15에서 바울이 가정법을 써서 “방언으로 기도하다”라는 말을 쓴 것은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박: 이것은 헬라어의 기초를 전혀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헬라어에서 가정법 구문이 반듯이 현실과 반대되는 상상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본문에서 현재 가정법으로 쓰인 구문인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은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혹은 기도할 때마다]”라는 뜻이다(Gordon D. Fee). 만약 본문에서 이 사람의 주장대로 가정법 구문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라면(예를 들어 내가 만약 새라면 날아갈 수 있을 텐데, 즉 내가 새가 아니기 때문에 날아가지 못한다는 말)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해야 한다.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14절) 그러면 이 문장은 바로 뒤 구절과 모순된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15절) 헬라어 사전을 보면 헬라어 에안 + 가정법 현재 구문은 “…할 때”를 의미할 수 있다. 5) 주장: 고전 14:28에서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는 “집에 가서 혼자 떠들고 혼자 들어라”라고 하는 것이다(364). 반박: 여기서 “자기와 하나님께”에 대척된 개념은 “교회에서”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인적으로 혼자 방언하라는 말이다. 방언이 그친 근거가 로마서 은사 목록(12:6-8)에 방언이 안 나오기 때문이라고? 노우호 목사는 방언은 바울이 로마서를 쓴 그 시점에 그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바울이 로마서 12:6-8에서 여러 은사를 언급하면서 방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때 방언이 그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13:8에서 방언이 그친다는 말이 이 때 실현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침묵에 근거한 주장(argument from silence)이라고 한다. 저자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았는데, 독자가 단순히 상상을 통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로마서 12:6-8에서는 고린도전서 12-14장과는 다른 종류의 은사를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 은사는 영적인 은사라기보다는 재능과 같은 ‘자연적 은사’다. 여기에 예언이 나오기는 하지만,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성령의 나타남에 의한 종류라기보다는 믿는 자에게 주어져서 “믿음의 분수대로” 사용하는 것이다(롬 12:6). 바울은 지금 영적인 은사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그러한 은사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지, 그 사이에 이 은사들이 그쳤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식의 추론이 옳으려면 다음과 같은 추론도 가능해야 한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의 하나님 나라가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다 뺐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에 관한 공관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를 필요가 없다.” 아마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추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은사 본문에 방언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울의 방언의 은사가 그쳤다고 생각하는 것은 침묵에 근거한 주장, 즉 상상의 결과일 뿐이다. 현대 교회의 방언은 가짜 방언이라고? 이들은 현대 교회에 나타나는 방언은 가짜라고 한다. 그 근거는 이것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대 방언은 만 사람이 하면 만 가지가 되는데, 그 어떤 것도 통역의 규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말한 대로 바울 본문을 잘못 해석한 데서 근거한 것이다.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바울이 분명히 말했다(고전 14:2). 그것을 통역하려면 기도해서 통역의 은사가 임해야 한다(고전 14:13). 그렇다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는 방언을 못 알아듣는 것은 자연스로운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함으로 하나님만 알아들으면 되는 것이다.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기도를 하려면 이성으로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영으로 하는 방언 기도와 이성으로 하는 기도를 모두 하겠다고 한다(고전 14:15). 그런데 이런 기도를 반대하는 것은 바울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현대 교회의 방언이 바울이 말한 방언과 같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은 서구 세계에서 늘 있어왔다. 이 분야를 오래 연구한 전문가 중의 하나인 막스 터너는 신약 성경의 방언과 현대의 방언 현상을 연구한 후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방언이 바울이 알고 있던 것과 동일한 현상이 아니라는 교조주의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한국 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축복하는 것으로 바울이 말한 방언과 부랍라는 것이다(고전 14:15-17). 바울이 이 방언을 많이 말함으로 감사했고(고전 14:18), 또 이러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 명령(고전 14:39)을 우리는 잘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방언의 기원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에 나오는 방언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사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방언을 연구하면서 학자들이 가장 먼저 뛰어들었던 영역은 이 방언의 종교사적 기원에 관한 것이었다. 학자들은 주로 헬라 종교와 철학에서 그 기원을 찾아보려고 했고, 유대교에서 그것을 발견하려고 한 이들도 있었다. 먼저, 방언이 헬라 종교에서 기원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델피의 여사제가 아폴로 제단에 올라가 종잡을 수 없는 신탁의 말을 하고 했는데,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방언과 연관시킨다. 또 디오니수스 제의에서 흔히 울부짖음과 광란이 있었는데, 학자들은 이것을 방언과 연관시키려 했다. 그 외, 일부 학자들은 헬라 시대의 마법 문서들과 영지주이와 몬타니스주의, 그리고 루시안의 글, 오리겐이 인용한 셀수스 등을 방언과 연관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영적인 현상일 뿐, 방언과는 상당히 다른 것들이었다. 먼저, 이런 것들은 대개 황홀경 상태에서 어떤 말을 하는데 반해, 신약에서 말하는 방언은 황홀경에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말들이 비록 알아듣기 모호한 말이라 하더라도 모두 모국어로 말하는 것이었던 반면, 방언은 근본적으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또한, 신탁이 신의 메세지를 인간에세 전달하는 종류의 것이었다면, 방언은 인간이 신께 기도하는 형태였다. 그래서 그 외형이 비슷하다고 해서 이러한 것들을 방언의 기원으로 볼 수 없다. 둘째, 방언이 구약 혹은 유대교에서 기원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방언의 전조를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예언의 영이다. 예언의 영은 유대교에서 예언보다 더 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성령의 역사를 통칭하는 말이다. 여기에는 은사적 계시와 지도, 은사적 지혜, 은사적 감동적 설교와 찬양과 감사 등이 포함되어 있다. 누가도 오순절 날 임한 성령 충만의 결과로 나타난 방언과 하나님 찬양 현상을 말세에 임할 특별한 종류의 예언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행 2:14-21).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 찬양, 감사를 내용으로 하는 방언이 구약-유대교에서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동안 구약에는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사 28:9-13)을 방언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고, ˹욥의 유연˼에 나타나는 “천사의 방언”(56-51장)이 신약에서 말하는 방언의 기원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었다. 우선, 이사야서 29:9-13에 나오는 “더듬는 입술과 방언”은 신약에서 말하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그런 종류의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외국어를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에게 말하는 앗시리아 말이다. 또한, ˹욥의 유언˼에 나오는 “천상의 말”도 모국어와 다른 어떤 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욥의 딸들이 하는 말의 아름다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신약 성경 이전에 나오는 여러 영적 현상들에서 방언과 똑같은 것은 없어따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약과 유대교에서 예언의 영이 주로 예언자들을 비롯한 특정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신약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예언”이라는 것으로 방언은 이미 예언되었다(민 11:29; 욜 2:28; 행 2:17-18). 여기서 예언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영감을 주어 신자들이 하게 되는 영감의 말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예언이다. 그런데, 그것이 신약에서 말하는 방언과 같은 것이라는 것은 오순절 날에야 비로소 알려진 것이다. 방언의 기원에 관한 위와 같은 결론은 현대 타 종교에서 일어나는 방언과 유사한 현상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가에 대한 답변도 간접적으로 준다. 그 동안 아르헨티나의 전통적인 토바(Toba) 의식, 힌두교에 근원을 두고 있는 금빛(Golden Light)이라고 알려진 요가 전통, 혹은 몰몬교에서 말하는 방언 비슷한 현상 등을 신약 성경에 나타난 방언과 유사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었다. 또 불교의 고승들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보도도 있다. 또 심리적으로 방언을 병리적인 현상으로 설명하는 주장들도 있었다. 또 방언은 학습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이런 것들로 볼 때 교회에서 일어나는 방언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방언을 통해서 어떤 사람의 신앙을 가늠해 볼 수 없다고 하면서 방언을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일 것을 은근히 조장하는 경우도 있다. 우선, 비록 언어적 현상으로는 이것들이 방언과 비슷할 수는 있어도, 이러한 것들은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아니다. 그것들의 출처가 성령이 아님은 물론이고, 이러한 현상들에 주로 황홀경이 동반되는데 반해, 성경이 보여주는 방언은 그러한 현상들과는 일정 거리가 있다. 또 그러한 종교에서는 경전 문서 자체에 방언과 같은 어떤 것들이 없다. 다만 종교인들에게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뿐인데 그러한 현상은 정신적, 사회적, 종교적 측면에서 설명 가능하다. 그래서 바울과 누가에 있어 방언 현상과 방언의 신학적 기능은 모두 독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타 종교에 방언과 비슷한 현상이 있다고 하여 교회에서 방언을 할 때 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바울과 누가가 보여준 방언에 대한 태도와는 다르다. 바울과 누가는 헬라종교가 성행한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방언을 수용하고 체험하락 권했지, 이방 종교에 그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또 처음에는 방언을 심리학 분야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이 방언을 병리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성이 많았으나 현재는 오히려 방언이 심리 치유에 공헌한다는 견해도 많다는 면에서 방언이 꼭 병리현상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나아가 현재 교회에서 행해지는 방언이 모두 학습된 것이라는 주장은 방언에 대한 인본주의적 설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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